2024. 6. 13. 23:04ㆍ운봉소식 2024년
춘향골 바래봉 파프리카 작목회가 결성되어 재배를 시작하는 시기가 암울하고 불투명한 2000년도였다. 새천년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 농업계는 1993년 무역 자유 협정 (GATT) 우루과이 라운드가 체결되었고 IMF(세계 무역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금융기구) 외환 위기가 닥쳐 농업경제 또한 풍랑과 격랑 속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각 나라별 F.T.A (둘 이상의 나라가 수출관세와 시장점유율등 무역 장벽을 제거 무역을 자유롭게 하는 협정) 체결이 본격화되고 미국, 유럽 등 우리나라도 F.T.A 체결을 함으로써 쌀 의무 수입이 이루어졌다. 일본보다 낮은 (농민신문 2021년 10월 16일) 10년 관세 유예를 받았지만, 시장개방 후 과일, 채소, 육류를 비롯한 농.축산물의 증가와 개방의 충격은 농업계 전반에 걸쳐 파장을 일으켰다. 점차 쌀 농업이 어려워지자,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선도적 농가들이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오이, 상추, 피망 등 다양한 농업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농가 수익이 좋은 파프리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파프리카 작목회가 수출 일꾼을 자처하며 일본에 수출하게 되었고 저율관세로 국내시장을 잠식해 오던 EU산 농산물, FTA를 체결한 농업국에 수출농업이 열리면서 운봉농협, 지자체의 협력과 지원이 증대되었고 2005년 농산물 수출, 백만불 달성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초대 작목회장이었던 유경우 회장께서는 재배 기술이 부족하여 토경재배에 병해충이 발생하면 대처가 어려워 경제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선별과 판로에 어려움이 있어 함양서상, 글로벌통상, 전남화순 등으로 선별과. 판로를 개척했다고 한다.
춘향골 바래봉 파프리카 작목회 연혁
2005년 유경우 회장 취임
농산물 유통 개혁 대상 수상, 산지 유통 전문단지 조성 농산물 수출 1백만불 달성탑수상, GAP 인증 농산물 품질 경영 대상 수상
2010년 (고) 서흥석 회장 취임
농림축산식품부 지역 특화 품목으로 지정, 춘향골 파프리카 영농조합법인 창립, 공선출하회 우수조직 수상 산지유통 종합대상 수상
2014년 오범록 회장 취임
원예 전문단지 변경 승인 GAP 농산물 경진대회 2차 금상 수상(농림식품부) 수출농업 경진대회 대상 수상,
2018년 이수원 회장 취임 영농조합법인 등록 수출 아이디를 받으며 첫 중국 수출, 첫 베트남 수출・농림식품부 장관상 수상
2022년 박태성 회장 취임
농업 경쟁력 강화 대통령 표창 수상, 수출농업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농촌진흥청장상 수상
2005년 회원 수 26명 14억 달성
2016년 회원 수 50명 79억 달성
2022년 회원 수 31명 100억 달성
2023년 회원 수 25명 80억 달성
이 외에도 많은 공훈과 실적이 있으나 지면상 줄였음을 밝힌다. 신선 농산물 재배와 수출하기까지 역경과 고난은 필요불가분의 과정인 것 같다. 어느 작목회나 불협화음이 있기 마련인데 파프리카 작목회는 목소리를 줄이고 단합과 화합을 우선하였다. 매년 과잉 생산되어 값이 폭락하면 수급 조절을 위해 백여 톤에 이르는 파프리카를 자체 폐기하였다. 또한 각종 매스컴이나 SNS를 통해 홍보를 강화하였고 운영위원회. 유통위원회를 두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각종 교육과 조별 컨설팅을 통한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뒷면에는 운봉농협의 지대한 관심과 폭넓은 지원 박호연 팀장(운봉농협 파프리카 담당) 의 생산 및 유통 현황 국내 및. 수출시장의 동향 등을 체계적 자료화하여 농가에 전파하고 있기에 농협과 농가 간의 동반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파프리카의 성장은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로 비닐하우스의 현대화. 스마트 농업의 선도적 활동 청년 농업인의 유입 가속화. 정부 시책의 우수사례를 통해 전국의 모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밝은 면이 있으면 뒷 그늘도 있기 마련인데 박태성 회장은 전라북도 수출 전문단지 1호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2016년 50호 농가가 줄어 23년에는 25 회원 농가를 유지하는 배경에 관해 설명하였다. 예전에 비해 생산비가 3~5배 증가하였고 95% 일본 수출에 의지하였으나 초창기 1,300엔 하던 환율이 870엔으로 떨어졌다. 생산원가는 20여년 전이나 다름없는데 생산비의 높은 증가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WTO 영향으로 (무역 관계를 정의하는 많은 수의 협정을 관리·감독. 또는 무역장벽을 감소 또는 없애기 위한 목적) 수출물류비의 지원을 중단하게 되어 농가의 부담이 물류비까지 증대되었으며 이상기후로 병해충이 증감하여 농사에 실패하는 농가가 다수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초기에 실패하면 대체 작목이 빈약하고 실기한 비용 또한 만만찮다 (1000평 기준 5.000천만원 손실 예상) 현재 파프리카 농가가 작목전환을 한다면 타. 작목회의 작물이 과잉생산 되어 가격 하락 등 기존 작목회 간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박태성 회장은 물류비 지원 등 수출이 원만히 이루어지고 원예 농가가 상생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수출 전문단지와 일반단지의 사업을 구분 지원해야 한다고 했으며 경쟁력 확보를 위해 면적 확대가 필요한 농가에 적극적 지원을 지자체에 바란다고 하였다.
지자체에서는 각종 농산물을 홍보하고 소비 촉진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고 들었다. 소비 촉진 사업은 과잉 농산물을 제값 받고 어려움에 부닥친 농민을 돕는다. 그러나 단기적인 소비 촉진책이 과잉 농산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입농산물이 우리 식탁을 점령한지 오래고 저출생, 초고령화 사회 속에서 농촌은 농촌 소멸이라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나마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파프리카 농가와 원예 농산물을 생산한 후계농들이 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파프리카 수출 전문 단지의 선정과 노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동병상련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이다. 출처는 <오월춘추(吳越春秋)>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전국시대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광(光)은 합려의 자객인 전저(專諸)를 시켜 사촌 동생인 오왕 요(燎)를 시해 한 뒤 스스로 오왕 합려(闔閭)라 일컬었다. 자객인 전저를 천거하고 반란에 적극 협조한 공로로 오자서(伍子胥)는 대부(大夫)로 중용 되었다. 오자서는 본래 초(楚)나라 사람인데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 태부였던 아버지와 관리였던 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칼을 갈며 먼저 송(宋)나라로 도망갔는데 송나라가 혼란스러워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협조한 것은 사실상 합려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초나라를 공략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해에 백비 라는 사람이 또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나라 왕인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로 삼게 해서 함께 정치를 하게 되었다. 백비도 오자서처럼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처지였었다.
그때 같은 대부인 피리(被離)란 이가 오자서에게 백비의 천거를 힐난하며 말하길 “내가 보니 백비의 눈매는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입니다. 그런데 귀공은 왜 그렇게 그를 신용합니까?”라고 물으니 “그것은 그와 내가 같은 원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하상가 (河上歌)에 ‘같은 병에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같은 걱정에는 서로 구제하네….’ 라고 하였으니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 후 9년 뒤에 합려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자서는 백비를 경계하라는 피리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월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참언으로 결국 불에 타서 죽었다. 여기에서 동병상련, 동우상구(同憂相救) 즉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같은 근심거리 갖고 있는 사람끼리 서로 구제한다는 성어가 나온바 원래는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을 동정하는 좋은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으니 오자서의 죽임은 첫째는 은혜를 모르는 백비의 잘못이라 하겠고, 둘째로 선견지명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오자서의 잘못이라 하겠다.
오래전에 필자가 독일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독일 분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우리나라 남북통일에 대해 자기 나라 독일을 참고하여 더 나은 통일국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해준 적이 기억난다. 독일의 동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하루 속히 남·북의 38선 철조망이 걷혀져 서로 호형호제하며 탁주 한 사발 권하며 웃음꽃을 피울런지..... 그런 날이 속히 오도록 6월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본다.
바래봉비료 가축분퇴비 입상 카차흐스탄 수출길 열어
남원지역 가축분퇴비를 활용한 유기 질비료(펠렛) 해외 수출이 성사됐다. 바래봉비료영농조합(대표 박영수) 은 지난 3월 카자흐스탄 알마티 (PLANTA FRUIT LLP)와 ‘가축분퇴 비 입상(펠렛 수출 계약을 맺고 24일 40톤을 첫 선적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9년에 창립된 바래봉비료영농조합법인은 2017년 가축분퇴비에 바 실러스 발리스모티스(BS07M) 미생 물 균주를 접목하는 독자적 기술을 개발하여 특허 출원한 곳으로, 우수재활용품 GR인증, 친환경농자재 인증을 취득했고 2020년 7월 국내 가축 분퇴비 제품중 처음으로 해외 수출에 성공했다.
베트남 40톤 수출을 시작으로 베트남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시장개척으로 금회 수출길에 올랐고 오는 7월에는 캄보디아에도 수출 계약을 맺을 계획으로 가축분퇴비 해외 수출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박영수 대표는 “가축분퇴비 전문가가 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 고 있으며, 가축분퇴비 입상(펠렛)은 냄새가 없고 농업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면서 비료 효과가 높은 제품으로 작물이 잘 자라는 비료를 만드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란 포부도 잊지 않았다.
운봉이야기 6회는 호국의 달을 맞아 운봉을 중심으로한 한국전쟁(625전쟁)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자리를 빌려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신 호국영령께 감사드리며 우리 사회가 군인과 경찰 소방대원 등 제복 입은 분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을 좀 더 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부 정치 군인과 경찰이 독재정치를 시작하고 지속하여 국민을 억압하고 국민을 때리는 몽둥이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서 한국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공로가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이분들의 희생을 밑바타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논할 이야기의 중심은 한국전쟁(625전쟁)이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학살도 있고, 국군과 경찰이한 양민 학살 이야기도 있고, 우리군경이 운봉을 수복하고 빨치산을 격퇴한 이야기도 있다. 다만 직계 후손분들도 계시고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가급적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을 독자분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운봉이 인민군에게 점령된 것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쯤 돼서다. ‘라주바예프 6·25전쟁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이 7월 24일 고창에서 남원 방향으로 틀어 남원을 점령한 후에 그날 오후 늦게 구례를 점령한 후 다음 날 7월 25일 05:00 무렵에 순천, 그리고 06:30 무렵에는 여수항을 점령하였다고 기술돼 있다.
또 김성은 전 해병대사령관의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를 보면 전투 현황이 일자별 시간대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남원에서의 방어선 구축과 퇴각, 운봉고개(연재)에서의 방어선 구축했다고 했다. 이때 김기식 대장은 10여명의 정찰조를 편성한 후 그들에게 북한군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정찰조는 남원시내로 잠입 인민군이 남원을 점령하였음을 확인하고 이를 보고하기 위해 복귀하던 중 연재고개에서 최모씨가 주도하는 빨치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연재고개에 진지를 구축한 아군의 엄호로 인명피해 없이 원대복귀 인민군이 남원을 접수 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때 미군 19연대는 진주에 집결하고 있었고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있기 때문에 인민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진주에 집결하는 미 19연대를 엄호해야 했음으로 운봉고개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장계(長溪)~안의로 공격해 왔다. 안의는 이미 뚫렸고 함양이 위험해 지자 UN군은 운봉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한국군(민부대(민기식 부대)와 그의 지휘를 받고 있던 김부대(김병화 부대), 오부대(오덕준 부대) 그리고 해병대(김성은 부대)에게 함양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운봉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구축을 하던 우리 군은 각 참호와 진지에 배치되어 있던 인력과 장비를 종우장(현 축산연구원 부지)집결시킨 후 함양으로 퇴각했다.
그러니까 운봉에서는 운봉을 지키기 위한 한번의 전투도 없이 오토바이를 탄 인민군 4사단 기계화 부대가 운봉을 점렴했고 운봉은 그 후 두 달여간 인민군이 점령한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다.
『운성지』 기록에 의하면, 운봉 4개 읍·면의 인적 피해는 사상자 및 행방불명된 주민을 포함하여 총 270여 명에 달했다. 불타거나 파괴된 건물이 360호, 교량 파괴가 5개소, 가축 등 기타 피해가 1,106점이었다. 지역별 손실 상황을 살펴보면, 살해된 공무원 수는 운봉이 총 57명 중 37명으로 가장 많았다. 민간인 사망자 행방불명자 등은 자료마다 그 통계수치가 정확지 않아 이 자리에 기술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무장 상태의 민간들 피해가 컸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운봉국민학교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대신 아침은 빛나라 어쩌고 하는 인민공화국 국가를 배웠다. 이제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했다. 불과 몇년 전에는 천황페하 만세를 외치다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겨우 외웠는데 이제 다시 아침은 빛나라 어쩌고 하는 노래를 다시 배워야 한단다. 그 뿐인가, 세상은 미쳐서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것마냥 헤까닥 뒤집어져서 땅이 있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끌려가 사형 언도를 받고 면서기라는 이유로 마당에 끌려나가 죽창에 찔렸다.
그렇다면 국군에 의한 운봉지역 수복은 언제였을까?
운봉이 언제 수복되었는가에 대한 자료는 없다. 혹시 이 기사를 읽은 독자분 중 그에 대한 자료를 알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에 따르면 1950년 9월 28일 미 25사단 35연대가 남원으로 진입 24연대와 합류 29일 정읍과 이리(익산)지역으로 진격하고 27연대가 함향⇔남원 병참선을 경계하였다는 기록으로 봐 필자는 남원수복이 9월 28일이고 운봉은 9월 27일 혹은 9월 26일이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운봉 수복일이 9월 27일로 볼 때 두 달 60일 하고 3일간 운봉은 인민군 점령지였이다.
그 두 달 사이에 운봉에서는 인민 재판이 열리고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와 친일, 친미, 우익 활동 내지 동조자를 색출 인민 재판을 열어 처형하거나 매질과 모욕주기를 자행했다. 그 시절에는 독립운동하던 동지가 적이 되었고 야학에서 선생님이었던 사람이 붉은 완장과 죽창을 들었고 머슴이었던 사람이 인민 위원장이 되어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다. 지주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고 안방을 차지했다. 공산주의가 뭔지, 소비에트 혁명이 뭔지 모르지만 일단 땅을 나눠 준다고 하니 면장을 죽이고 경찰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 친구의 아버지를 때렸고 동네 아저씨를 죽였다. 그렇게 열병처럼 들끓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꿈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전세는 역전되었고 북한군은 쫓겨났다.
이제 국군이 들어왔다. 죽창을 들었던 사람, 아버지를 죽인 사람, 내 집과 안방을 빼앗았던 사람을 찾아 다시 죽이고 폭행했다. 다른지역 처럼 인민군이 썰물처럼 밀고 내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고 한차레 푸닥거리를 치리는 것이 아니라 고인 물이 되어 낮이고 밤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푸닥거리를 계속 하였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경찰국이 발간한 전라북도 호국경찰사‘1950년 11월 10일 관내 상황’이라는 자료를 보면 남원 관내 19개 파출소 지서가 있는데 그중 14개가 수복 5곳이 미수복이라고 되어 있다. 미 수복지역은 보절, 덕과 대강, 산내, 고기 출장소가 미수복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산내면과 고기리 주촌 덕산 행정 산덕 일대는 인민군 세상이라는 말이다. 휴전선에서 총성이 멎어도 총성이 계속해서 울렸던 땅,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고 보복하고 죽고 죽이던 땅이 운봉이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다. 여순반란 사건으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에다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정규군이 합세하면서 그 세는 엄청나게 늘어나 빨치산이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어디서 뭘 어떻게 먹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보급이다.
38선 넘어 북한에서 보급품이 전달될리 없으니, 빨치산의 보급은 현지 조달이다. 그러니 지리산 일원에서 그래도 논밭이 있는 운봉, 인월,아영이 주요 타깃이고 산간벽지 자연마을이나 외딴 마을이 주요 거점이 되었다.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는 줄여서 백야사라고 불렀다. 군경합동 작전사령부인 백야사는 백선엽 장군이 이끌었는데 이때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을 실시한다. 이 작전은 빨치산의 식량을 조달해 주는 산간지역 마을을 소개(불질러 태우고)하고 주민들을 읍내로 이주 시킨 후 빨치산을 산 꼭대기로 몰고 올라가 선멸한다는 작전이다. 그럼에도 빨치산은 중산간 마을로 내려와 식량보급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게 없었기 때문이다.
빨치산은 산에서 내려와 곡식과, 소, 돼지를 빼앗아 마을의 젊은장정들에게 등짐을 지워 가져갔다. 그들이 끌고간 짐꾼들을 산중턱에서 되돌려 보낸적도 있지만 근거지 노출을 꺼려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필자가 등짐을 지고 끌려가다 낭떠러지로 굴러 살아 돌아온 어르신에게 직접 들은 증언이니 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또 국군과 경찰은 인민군에게 식량을 조달시켰다고 죽이고 불지르는 일이 다반사였고 등짐꾼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와도 군인들에게 끌려가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어딘지 조사받는 것은 살아서 돌아온 댓가였다.
낮에는 국군에게, 밤에는 빨치산에게 밥해먹이는 일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이제 이 땅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의 투쟁의 땅이 아니다. 그냥 죽이고 죽고 뺏고 빼앗기는 야만의 땅이었다.
반동분자면 죽여, 빨갱이면 죽여. 반동분자로 의심되거나 협조 한자로 보이면 죽여, 빨갱이로 의심되거나 협조한 자면 죽여. 누구도 왜 죽이느냐고 빨갱이가 맞냐고 반동분자가 맞냐고 따지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죽기 때문이다.
빨치산의 총책은 이현상이다.
이현상은 충청남도 금산군 사람인데 이현상은 해방 전 지리산을 은신처로 일제와 투쟁하였던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발란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면서 본격적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오태록씨가 625 참전 군인 및 경찰, 민방위군등을 면담하여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인천상륙잔전이 후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덕유산의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 빨치산과 연합하기 위해 장수 번암 수분재를 넘어 사치재로 오고 있다는 첩보에 매복하고 있었다. 덕유산의 빨치산 부대가 지리산 줄기 덕두봉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일제 사격하여 여러 명의 인민군이 황산 다리 밑에 쓰러졌고 나머지 인민군은 산산이 흩어져 덕유산 쪽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특공대원 신모씨는 특공대원들의 총에 맞아 쓰러진 시체를 점검하기 위해 황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남자 여자 5명 정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 중 한 남자의 손목에 번쩍이는 것이 보여 확인해 보니 당시에 보기 힘든 자동 손목시계였다. 특공대원 신모씨가 그 손목시계를 풀어 자신의 팔목위에 숨겼으나 이를 목격한 대원이 이 사실을 고발하여 신모씨는 시계를 뺏겼는데 그 후 빨치산 외팔이가 생포되어 그의 증언으로 황산 다리 밑에서 죽은 자 중 손목시계를 차고 있던 사람이 인민군 정규군 연대장 맹봉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로서는 거물급 장교를 사살한 것이다.
당시 빨치산과 전투를 벌였던 우리군의 체계는 전체적 작전은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거쳐 2군단이 맡고 각 지역의 치안과 방위는 전투경찰이 맡았으며 그 전투경찰을 보조했던 인력이 각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방위조직이 있었다. 이 방위조직을 일명 특공대라 불렀는데 차후 향토방위대 가 되었다.
이현상 부대가 참패한 유일한 곳이 운봉전투다. 산내, 이백, 아영 지서와 면사무소가 빨치산에 점령되었는데 운봉만은 예외였다. 당시 우리 군경에게 이현상 부대의 기습공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목표한 곳은 예외없이 점령되었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기 때문이다.
이현상은 1952년 9월 19일 ‘운봉해방작전’이 전개됐다. 이때 운봉지서장 및 특공대원들은 지서 주변에 깊이 2m 넓이 3m 폭으로 방어웅덩이를 파고 방화벽을 설치했으며, 고목이 된 괴목 나무더미 위에 부비트랩(지뢰자동 폭발기)을 설치하여 주야 1주일간의 공방 끝에 빨치산 수십 명을 사상시키고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이현상 부대의 유일한 참패였고 빨치산이 전의를 상실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서한진 특공대장의 공이 컷으며 이후 서한진 특공대장은 바래봉에서 수색작전 중 이현상부대와 교전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특공대장 서한진에 대해 알려진바가 많지 않다. 다만 남원 출신 오찬식 소설가의 ‘마뜰’ 라는 소설에 는 권페기 이장이 서한진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과 일제강점기 일본군이었다가 한국전쟁 발발이후 지역방위에 투신 특공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순국했다는 정도다.
https://youtu.be/ARUQYqQS6ro?t=5259
유튜브에 올려진 TV문학관 작품
1953년 9월 17일 이현상이 사망하면서 지리산의 빨치산은 소멸하였고 운봉에서 총성이 멎었다. 그러나 운봉은 더 이상 운봉이 아니었다. 잘 웃고 친절했던 이웃들은 무뚝뚝해지고 말이 없어졌으며 쉽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누가 또 빨갱이라고 모함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속내를 보이지 않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며 목소리가 크고 우기기를 잘하고 싸웠다하면 끝을 봐야 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고 한다. 5~60년대 운봉지서 사진을 구할 수 없어 70년대 사진을 대신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경찰서라 함은 군부대와 같이 모래주머니와 철조망이 둘러쳐진 초소에 칼빈총을 든 경찰이 경비를스고 있었고 건너편 면사무소도 예비군이 M1 소총을 들고 경비를 섰었다.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88올림픽까지는 그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참고문헌:
라주바예프 6·25전쟁 보고서(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전라북도 호국경찰사
김성은 전해병대사령관의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오태록 목사(전운봉예비군중대장)의 증언,
가재 상흔(傷痕)·오래된 기억들의 방
▶ 다음호에 계속
2024년 6월 6일 운봉서림 공원에서는 현충일 추념식을 가졌다. 이은주 운봉읍장의 추모사와 헌화로 진행된 이번 추념식에는 19년째 계속되어온 로타리클럽의 자장면 봉사가 함께하여 그 뜻을 더하였다.
운봉초등학교 51회 총동창회 회장 정준조는 1박2일 일정으로 산청 허준 동의보감촌을 둘러보며 우의를 다졌다. 어렸을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은 이번 여행은 동창생들에게 큰 의미와 기쁨을 안겨 주었다.
‘운봉 지킴이 동호회’는 운봉의 숨겨진 비경을 탐구 보호하고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는 등산 코스를 개발하여 운봉의 비경(秘境)을 많은 분들이 손쉽게 접근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고 매요마을에서 백두대간 전시관까지의 산줄기를 타고 걸어 보았다.
출발지 ■ 매요 마을
마을의 명칭은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말 마(馬)’자와 ‘허리 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馬腰里)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정유재란이 7년 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惟政))이 산천을 두루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였다. 사명당은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梅要里)로 고치 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그 후부터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고남산 ■ 첫 산마루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북서쪽에 산동면과 경계의 산으로 정상에서 운봉 분지와 산동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말에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나서 산신제를 올리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여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 불린다. 산 정상부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남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방아치 ■ 역사 유적지 탐방
방아치 전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전투이다. 남원에 웅거하고 있던 김개남이 지휘하는 전라좌도 농민군이 북상한 후 김홍기, 최승우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끌던 운봉의 민보군 사이에 수개월 동안 대치가 이어졌다. 경상도 쪽으로 진출하려는 농민군에 대비하여 운봉 수성군(민보군과 관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1894년 남원 서부 평야 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과 수성군과 함께 대치하고 있었다. 농민군들이 영남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나 영남 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게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한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농민군이나 민보군, 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정신을 계승하고 평화와 상생을 다지고자 전적비를 세웠단다. [출처] [남원관광]남원, 동학농민혁명 발자취를 따라서
▶ 다음호에 계속
☞ 운봉지킴이동회에 대한 문의 010-3131-1088
2024년 5월 31일 기준 운봉인구
인구수 : 3,604명 (남 1,750 여 1,854)
세대수: 2,043세대
2024년 하반기 방역소독
○ 기 간 : 2024. 6 ~ 9월
○ 대 상 : 33개 마을(자연발생 마을 포함)
○ 방 법 : 연막, 분무 병행
○ 자율방역단 “위생해충 구제의 날” 운영
- 기 간 : 2024. 6. 1. ~ 9. 30.까지
매월 1·15일 05:30 ~ 07:30
- 대 상 : 마을권 취약지
- 방 법 : 일제 방역소독 실시(연막, 분무 병행)
○ 방역소독기 대여제
- 기 간 : 2024. 6 ~ 9월
- 방 법 : 장비 및 약품 지원 / 2일 대여
2025년 주민참여예산제 주민제안사업공모
○ 공모기간 : 2024. 5. 9. ~ 6. 28. / 50일간
○ 공모자격 : 남원시민 누구나
○ 대상사업
- 시민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업
-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 일자리 창출 방안, 시민 건강증진을 위한 방안, 편리한 도시 환경을 위한 방안, 청소년 문화 향유를 위한 방안, 생활 SOC 사업 등 시설비 사업
※ 청년·공동체 정책 반영 사업 우선순위 배정 및 소규모시설사업 후순위 배정
○ 제외사업 :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업, 타기관 사업, 민간보조사업 등
○ 접수방법
- 홈페이지 : http://www.namwon.go.kr ⇒ 정보공개 ⇒ 주민참여예산 ⇒“예산사업제안” (실명인증 후 참여 가능)
- 방 문 :
남원시청 기획실 예산담당 ☎ 063-620-6019
- 우 편 :
(우55738) 남원시 시청로 60, 남원시청 기획실 예산담당
2024년 양귀비등 마약류 불법재배 단속
○ 단속기간 : 2024. 5. 13. ~ 6. 28.
○ 단속대상 : 양귀비 등 밀경작, 밀매 및 사용자
○ 단속지역 : 관내 지역(집 주변 및 가축사육 농가, 텃밭, 비닐하우스 등)
○ 단 속 반 : 남원시보건소 마약류 감시원 1개반 2명, 남원경찰서 2팀
○ 협조사항 : 관상용, 가축, 치료, 자생 등의 이유로 양귀비·대마 불법 재배·경작금지 주변에 자생하는 양귀비·대마 발견시 신고(남원경찰서, 보건소)
▶정정 알림
지난 5월호에서 94회 춘향제 대동길놀이 제목을 73회춘향제대동길놀이로 잘못 기재하였습니다.
지난 5월호 유기엽 장태천 님은 가산마을 분임을 바로 잡습니다.
6월 추천도서
부정기 후원(입금된 날짜 순)
운봉새마을금고
정기 후원(입금된 날짜 순)
배분남님, 홍봉록님, 김정아님, 오용담님, 정원재님, 이은숙님, 조미현님,운봉읍발전협의회, 양재우님
본 후원 명단은 매달 5일 기준 입니다.
5월 27일 배종민 모친 김종식님 별세
아들: 배종민, 배종구
자부: 김서운, 변희수
딸 : 배미자, 배미경, 배미숙
사위: 이기우, 한지용
발인: 5월 28일
장지: 승화원
5월 26일 박인수 빙모 윤정업님 별세
아들 : 이종민
자부 : 오혜숙
딸 : 이성심,이시현,이선숙,이은우,이은희
사위 : 강중원,서병원,김기호,박인수,김상현
발인 : 5월 28일
장지 : 산청호국원
운봉소식은 '전라북도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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