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5. 11:55ㆍ운봉소식 2024년
운봉소식 창간 2주년
운봉소식발행위원회는 2022년 6월 15일 운봉소식을 창간한 이운봉소식발행위원회는 이후 2주년을 맞아 발행 위원 는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운봉소식은 후 통권 24호를 발간하면서 운봉소식 강령에 충실하였나를 돌아 보고 앞으로 더더욱 운봉소식 발행에 충실하여 운봉읍민과 재향민의 기앞으로 기대에 부흥하는 활동을 하겠다는 다짐의 자리로 삼았다.
대에 이러한 우리 운봉소식 발행위원들의 마음 가짐을 더더욱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운봉소식 강령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운봉소식 강령운봉소식 강령
●운봉에 관련된 소식을 전한다.
●훈훈하고 유익한 소식을 전한다.
●지역민과 출향민이 소통하는 장을 만든다.
●운봉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창조 계승한다.
●종교적 신념과 정치색을 주장하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살기 좋은 운봉을 만들며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쓴다.
●운봉의 역사를 보존하고 운봉의 삶과 생명을 기록하여 전한다.
포도는 우리나라 과수 중 감, 감귤, 사과 다음으로 많이 재배되고 있는 중요 과수 작목이다. 과수 작물 중 타. 작물에 비해 소득이 높은 편이고 FTA. 등으로 칠레산 포도가 식탁을 차지하고 있지만, 1인당 포도 소비량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인당 소비량은 2021년 기준7.5kg으로 현재는 대폭 상승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출처: 취송원농부) 이러한 포도는 친환경 안전 농산물에 적합하고 타닌 안토시아닌 레스베라트롤 등 노화 방지와 암 예방에 좋은 기능성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남원지역에서는 춘향골 포도 흥부골 포도 운봉지역에서 생산되는 고랭지 포도가 있는데 그 중심에는 직전 회장 이판영, 포도 작목회장 오정필, 김창열, 재무 정우용 감사 장수호 운영위원 5명 중 김상태. 박정택 님 등 40여 농가가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포도하면 안성 포도가 먼저 떠오르는데 최초의 포도 재배지이며 1901년 프랑스 국적의 앙투안 콩베르 신부가 안성 천주교 성당 앞뜰에 심은 것이 포도 역사의 시초이다. (출저-지식백과) 운봉에서는 하우스를 짓고 규모가 있는 시설재배를 시작한 소석마을 김성수 (고) 신하수 김종갑, 행정마을 서명석, 유평마을 오진환, 임리 강갑구, 공안 구상회 님 등이 시작하였다 한다.
현재 포도 작목반의 작물 중 캠벨과 샤인머스캣이 있는데 캠벨은 적포도이고 샤인머스캣은 청포도이다.
현재 40여 농가중 캠벨이 20 여농가 샤인머스캣 15 농가 샤인과 캠벨을 겸한 농가는 10여 농가에 이른다고 한다 캠벨은 공선반을 조직해서 공선을 시작한지 10여년이 넘고 정착도 잘 되어 롯데마트 초록마을 (토담회사)에 공선된 포도를 납품하고 있다고 한다. 오정필 작목회장께서는 인터뷰중 경기도 송산 포도를 언급하셨는데 화성시 송산 포도와 고랭지 포도의 생산 주기가 겹쳐 고품질 포도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고 했다. 2024년 6월3일 농민신문에 따르면 화성 송산포도의 생산농가는 286농가 연간 650t 가량을 생산한다고 한다. 우리 지역과는 비교가 안되는 공룡 포도 단지 이지만, 고랭지 포도의 잇점인 높은 당도에 선호도가 좋다고 한다.
오정필 회장은 당도도 좋고 품질도 좋으며 선호도를 높이기 위해 균일한 포도를 생산 공선해야 한다며, 초창기 공선은 어려웠으나 현재는, 불량률 제로에 반품이 없는, 고랭지 공선 포도가 으뜸이라고 말하였다.
2023년도에는 샤인머스캣을 베트남에 첫 수출하는 쾌거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과잉 생산되어 값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보안책으로 면적을 2만평 규모로 확대 연간 수확량이 50t은 되어야 안정적인 수취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운봉농협에서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성남 낙생농협, 부산 금정 농협에 홍보와 판로 확대에 힘써 달라고 했다.
상큼 달콤한 샤인머스캣 베트남 수출을 기회로 일본 대만, 홍콩 등 수출 확대를 통해 농가의 수입이 증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산물 안전성 관리 고품질의 포도, 농협의 마케팅전략. 지자체의 시설재배할 때 꾸준한 협력과 지원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농가는 고품질의 포도를 생산함으로써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교육의 질을 높이고 정보 교류를 통해 과잉 생산되는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판매해야 하지만 소비 촉진과 홍보에서는 작목회 차원의 어려움이 있으므로 농협과 지자체에서 적극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국사무쌍(國士無雙)은 한나라 안에서 둘도 없는 뛰어난 무사 (선비)로서 천하제일의 인재라는 뜻의 말이다. 중국의 삼국시대 한(漢)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을 보고서 소하(蕭何)가 평가했던 말에서 유래 된바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등에 그 기사가 나온다. 내용을 살펴보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두 영웅이 자웅을 겨루던 때의 일이다.
당시 한군(韓軍)에는 한신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그는 회음(淮陰)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초왕(楚王) 항우를 섬겼으나 항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황우에게 크게 실망한 한신은 초나라의 진영을 도망쳐 나와서 유방의 군대에 의탁했다. 여기서 그는 부장 하후영(夏侯嬰)에게 발탁되어 정승인 소하의 눈에까지 띄게 되었다. 소하는 한신의 기개와 재주에 기대를 걸고 이따금 유방에게 그를 천거했다. 그 무렵, 유방의 진영에서는 고향을 그리다 향수병에 걸린 부장이나 병사들이 도망을 치는 일이 비일비재해짐에 따라 군사의 사기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소하가 한신을 여러 번 천거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의 정도에 머물러 있던 한신은 유방에게도 싫증감이 있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소하가 한신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황급히 말을 타고서 그 뒤를 쫓았다. 큰 싸움을 목전에 두고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소하가 갑자기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본 한 장수가 소하도 도망가는 줄 알고 유방에게 아뢰었다. ‘그렇게 믿었던 소하마저 도망을 치다니!’ 보고를 들은 유방은 크게 노여워했다. 그런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기쁨과 울분이 엇갈려서 노한 얼굴로 고함을 치며 “도망을 치다니! 그게 정승이란 자가 할 짓인가?” 소하는 차분히 대답하길,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도망친 한신을 쫓아가서 다시 데리고 온 것뿐입니다! “이제까지 도망친 여러 장수는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만, 한신 같은 이는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만한 인물로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 파촉(巴蜀)의 땅만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한신 같은 이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동방으로 진출해서 천하를 차지하고 싶으시다면 한신을 제쳐 놓고는 함께 군사 전략을 도모할 인물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유방이 대답하길, “나는 한중(韓中) 근방에서 머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소. 천하를 재패하는 것이 내 소망이오”
“그러하오시면 한신을 활용하십시오.”평소에 소하를 신임했던 유방은 소하의 말에 따라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이는 기원전 206년의 일로서, 그 뒤로부터 한신은 과연 기대했던 대로 훌륭한 전공을세웠으며,드디어 초(楚)나라 왕이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보면 국사무쌍(國士無雙) 즉 나라의 선비(무사)로 둘도 없는 유일무이한 ‘훌륭한 이’란 뜻에 걸맞은 분이 임진왜란 시대에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시고, 또 한 분을 든다면 무민공 황진(武愍公 黃進) 이시다. 충무공 이순신은 너무나도 유명해 삼척동자도 알고 있지만, 무민공 황진은 훌륭한 무관이지만 비교적 알려지지 못했으니 충무공의 그늘이 너무나 컸나 보다. 국사무쌍의 재질을 지녔던 황진 장군은 남원 출신으로 조선 명신 황희 정승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웅치와 이치 전투 및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나큰 군공을 세운 분으로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임진왜란 당시에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진주성에서의 최후를 전달받은 이순신 장군이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할 정도로 그 무용을 떨친 것이다.
국사무쌍으로 중국에 한신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조선에 국한함) 이순신 장군 이지만, 한 분 더 말해 보자면, 당연히 남원 출신이신 무민공 황진(武愍公 黃進)장군 이심을 국사무쌍이란 고사성어를 통해 독자분들께서 상기하였으면 좋겠다.
운봉에는 판소리 동편제가 있다. 비전마을 앞 동편제의 창시자 송흥록 생가가 있는데 그 뒤편 황산에 국악의 성지가 있다. 이곳에 이러한 생가 조성과 판소리 보존 및 전수관이 자리를 잡계된 이유는 운봉이 판소리 동편제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부르는 판소리 서편제라 하고 동쪽에서 부르는 판소리를 동편제라 하는데 발라드와 댄스곡을 구분하는 것처럼 음악적 특성을 두고 구분하였다.
그러면 운봉이 어떻게 판소리 동편제의 성지가 되었을까? 18세기 중반부터는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문헌상으로 정확한 기록을 찾을수는 없으나 남겨진 자료들로 유추하자면 하층민들이 많은 장터같은데서 재담꾼이 늘어놓는 사설 같은것이 인기를 얻어 양반 이라는 지배층들이 찾게되고 좀더 격식을 갖춰 사자성어를 집어 넣고 스토리를 다듬어 가락을 붙였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정설이다. 마치 흑인 음악의 재즈나 힙합이 대중 음악으로 받아 들여지는 발달사와도 비슷하다.
이 시기에 활약한 명창들 송흥록, 송광록 형제가 있었다. 송흥록이 형이고 송광록이 그의 동생이다. 송광록은 송흥록의 고수였다가 형 송흥록이 세도가 김병기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로 귀향을 가자 동생이 대신 판소리를 하여 명창이 되었고 그의 손자 송만갑이 명창이 되었다. 비록 송흥록 일가가 구례로 이사하여 활동하였다 하나 그의 손자 송만갑이 운봉에 터를 잡고 동편제를 집대성 하였고 인간문화재 (고)박초월(1916~1984) 선생 또한 운봉에서 태어나고 판소리를 배웠기에 남원시에서 생가터를 조성하였다.
박초월 선생을 순천 태생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그의 아버지 박덕삼은 굿판에서 장고를 치는 악사였고 어머니 배순이는 당대 알아주는 씻김굿의 명인 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박덕삼이 세명의 부인을 두고 10남 3녀의 자녀를 두는 등 가정에 불화가 잦아 아버지 박덕삼과 별거를 하기 위해친정인 순천으로 갔고 어린 박초월이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머물면서 판소리를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가 중론이다.
아버지는 굿판에서 장고를 치고 어머니는 씻김굿 대가였으며 그의 언니 박초선 역시 1930년 시조 시인으로 입문하여 경성방송국에서 소리를 하는 등 명성이 높았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동편제의 발상지와 성장지가 운봉이라는 점이 설명될까? 뭔가 부족하다. 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부문에 박희옥씨가 등장한다.
박희옥씨 1892년(고종 29)는 운봉의 만석꾼으로 삼남학당을 수료했다. 삼남학당은 1900년에 세워진 일본인 학교로 이곳에서 일어를 배웠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박희옥 씨로 묘사되는 사람이 태평양전쟁에 쓸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했다는 대목이 있으나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희옥 씨의 행적이 친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남원농업고등학교 건립비 1만 원을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감수 포장을 받았고, 193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를 받았으며 조선 임전보국단 발기인을 지냈다.
이러한 전력으로 하여 박희옥씨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에서 박희옥씨를 거명하는 이유는 박희옥씨가 송만갑 씨를 비롯한 그의 문하생들을 후원하였고 그 결과물로 운봉에서 명창이 배출되었다는 점인데 개인적 후원이 대부분라 이렇다할 사료는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비전마을에 2층 누각이 있었고(이것이 하마정인지는 불분명하다)이곳에서 박희옥씨가 손님 접대를 위해 큰 잔치를 열면 2층 누각에 손님이 자리를이 잡고 람천 보에 띄운 배에서 소리꾼이 판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박부자가 잔치를 연다는 소문이 나면 근동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판소리를 뚝방에서 들었다고 하는데 춘향제 때 인기가수가 초대되면 시민들이 구경하러 가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비전 마을은 함양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국도 24호선의 옛날 길이 있었다. 이 길은 남원, 인월, 아영, 번암, 구례, 운봉으로 갈라지는 분깃점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육거리’라는 옛 지명은 운성지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곳은 상당히 번화한 곳이라 방고개가 있었다. 때문에 선비들이 과거시험 결과를 이곳에서 확인하였다.
운봉에는 하마비가 두 곳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향교 앞에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황산대첩비 앞에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왕의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참배하고 지나야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지(聖地)앞의 차 없는 거리? 조성 같은 개념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소중한 우리의 역사가 지금은 흔적도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
박계현(朴啓賢)1577년(선조 10년)에 황산대첩비를 왜 세우자고 했을까? 그가 올린 장계에는 유생들이 태조왕의 승전지를 기념하러 찾아 왔으나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는 민원이 있어 이에 비를 세워 태조왕의 승전지를 기념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음을 미뤄 당시 지배 계층들이 일종의 성지순례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곳 황산대첩비지 앞 육거리 즈음은 번화한 거리임에 분영하다. 일단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 길은 광한루와 연계되어 있는 내륙길이다. 광한루는 본래의 기능이 포구다. 마포나루, 송파나루 처럼 광한루는 나루터였고 이곳을 통해 서해안의 소금과 해산물이 들어오고 운봉일대에서 생산된 세금(쌀)과 임산물 목재 유기제품이 실려 나갔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4.25m 의 태조 이성계의 승전비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를 세우고 비와 비각을 관리하는 관리를 두게 되고 관리가 있으니 식솔들이 따라와 마을이 조성되고 이 마을을 비전이라 불렀다.
황산대첩비는 해방되기 불과 8개월 전인 1945년 1월에 폭파 되었다가 1957년에 귀부(龜趺-거북이머리-)와 이수(이首-거북등에 용이 서린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고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홍살문·삼문·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운성지에 따르면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비(碑) 앞에 있는 마을 이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 한 비각(碑閣)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사람이 황산대첩비지 앞을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야 했다. 박계현의 장계와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 등을 고려하면 조선의 양반들이 성지 순레하듯 태조왕의 승전비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성지 235쪽에 따르면 하마정은 어휘각 서편에 있던 정자로 2층 규모의 크기다. 여러 비석과 함께 주막이 있었는데 1961년 홍수로 소멸(掃滅)되었는데 그 위치는 운봉읍 화수리 828번지로 추정한다.
하마정 앞에 살았던 심복수 님의 증언에 따르면 하마정은 두 채가 있어 하나는 하마비를 보호하는 작은 정자이고 하나는 사람이 쉬어가는 정자였다. 심복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이 쉬어가는 하마정 기둥이 어른 두 아름 정도라고 하니 광한루의 누각과 비슷한 규모의 크기가 아닐까 짐작된다. 또 하마정 앞에는 7~8가구가 살았는데 여관 ,식당 주막 등이 있었음을 똑똑히 기억 한다고 했다. 하마정 마을에 살던 토박이 분들은 모두 객지로 떠나셨다고 한다.
조선을 지배한 이념은 유교다. 그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사당 앞을 서역화 해 말에서 내리도록 한 하마비를 세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새 왕조를 창건한 모태가 된 태조왕의 승전 기념비 앞은 어떨까? 예를 들어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셨다 해서 경기전에 하마비를 세웠다. 운봉의 하마비는 전각도 있고 누각도 있었다 하니 경기전 하마비 보다 더 웅장하였으면 웅장하였지 그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 지도는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고지도인데 혈암과 비각이 표시되어 있고 육거리 갈래길도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는 현재 하마비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하마비가 아니라 태조가 이 땅의 만백성을 구해 조선을 건국하는 발판이 되었던 성지의 하마비가 없는 순간 황산대첩비지는 그저 흔한 역사 유적지에 불과하다. 한 고을에 하마비가 두개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왕실의 능이 있는 경기도 권역이나 양반들이 많았던 안동지역 외에는 운봉이 유일하다 할 수도 있다.
오늘 이자리를 빌어 편집자는 하마정과 하마비를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참고문헌
송흥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송흥록 - 디지털남원문화[
남원시, 가왕 송흥록 생가, 팜프렛, 2011년 발행
박황《민속예술론》. 한일문화보급회. 72~73쪽쪽
태조이성계 관련 역사재조명 및관광자원화 방안연구 용
역 2019. 11 전라북도.전주대학교
취재차 준향마을 가는 길이다. 소재지에서 마산 고개를 지나 마을회관까지 약 1.8km의 거리다. 가는 길 오른편 논들에는 벼 포기가 가지 벌이(분열)가 많이 되어 벼 한 포기가 어른 큰 주먹 만하다.
오늘이 마침 24절기 중 하나인 ‘소서(小暑)’다. ‘작은 더위’라고 불리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도 한다. 또 이 시기는 여름 장마철이기도 하며, 소서가 시작되면 옛날에는 한창 논매기를 하였다.
또한 산이나 들에서 억센 풀을 베어(일명 풀베기) 퇴비를 마련하고 논두렁의 잡초를 제거한다. 하지 무렵에 심은 콩·팥 밭의 김을 매준다. 또 이때는 밀과 보리를 수확하기도 해서 국수나 감자 넣은 수제비와 같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자주 즐겨 먹기도 했다. 잠시 옛 시절로 돌아가 그때를 회상해 본다. ‘아하~ 그랬었지’ 하고 느끼며 정겹던 그때가 그리워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번 7월호는 준향(準香)마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준향마을은 지세가 무난하여 천재지변이 없고, 산수가 수려하며 유행병이나 괴질이 없었다고 한다. 인심이 순후하여 도적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않아 삼재가 없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처음에는 향촌(香村-향기 나는 마을, 양지바른 그곳에 있는 마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달성서씨와 풍산 유씨 등이 정착하면서 준향, 또는 준행(準杏)이라 부르게 되었다.
준향리가 형성된 것은 고려 전기로, 협계태씨(陜溪太氏, 황해도 신계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가 정착하여 약 4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390년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걸쳐 달성서씨가 이주해 왔고, 그 후로 차츰 성주배씨, 김해김씨, 풍산류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후기 달성서씨들이 처음 정착할 때는 화전민 생활을 하였으나 차차 평지를 개척,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윤택해졌다.
지리산 영봉의 지기(地氣)가 수정봉을 타고 양지산성과 음지산성을 지나 마을 남동쪽에 있는 성주봉에 그 정기를 뭉쳐 놓았다. 양지산성과 음지산성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계곡을 만들어서 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준향천(갓바라재에서 발원하여 행정제를 지나 마을 앞으로 흘러 소재지 람천으로 합류하는 천)에 합류한다.
음지산성과 양지산성을 합쳐 준향산성(準香山城)이라고 부른다. 준향리와 이백면 과립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에 양지산성이 있고,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에 음지산성이 있다. 동학농민운동 때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축조방식과 출토유물 그리고 주변의 유적 등을 고려해볼 때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산성은 서로 550m 정도 떨어져 있다.
준향산성에는 이중(二中) 순라도(위, 아래로 길이 2개가 만들어 짐)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그 길이는 노치산성에서 가산산성까지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신라와 백제의 국경 순찰 목적으로 조성되어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에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요지(陶窯址, 가마터)가 있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650m가량 떨어진 ‘행정제’ 북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즉, 행정제에서 준향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110m 정도 가면 민묘 구역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5m 떨어진 곳에 있다. 준향 도요지는 기존에 조사했을 당시에도 가마 일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오래전 소로를 조성하면서 생긴 절단면에 가마와 관련된 숯이 노출되었는데 유구가 잘리는 등 훼손 정도가 심한 편이다.
또한, 준향감리교회 하단부(박남재 고개)와 마을 앞 남쪽 약 300m 지점에도 생활도자기와 도가니 가마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인 백토가 있고, 그릇 파편 조각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준향감리교회(1980년 설립)를 지나 좌측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마을 앞 소나무 동산으로 조금 진행하자 분묘 2기가 나오는데 그 묘지 앞에 ‘고인돌(일명 조순 바위)’이 있다. 그 고인돌 아래에는 작은 고임돌이 고인돌을 받쳐주고 있다. 고인돌 윗면에는 6개의 바위구멍이 일자로 새겨져 있다.
마을 가운데에는 마을회관(2005년 건립)이 소재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밝은색 벽돌에 몇 가지 유채색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졌다.
바로 옆에는 단아한 모습의 정자가 있는데, ‘향화정(香化亭, 2009년 건립)’이라고 표시된 현판이 부착되어 있다. 목조 기와지붕으로 4면은 알루미늄 샷슈와 유리창으로 안과 밖을 서로 볼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향화정 옆에는 전체적으로 붉은색 계통의 벽돌을 사용하였고 강철지붕으로 재시공하여 지어진 경로당(2003년 건립) 이 소재하고 있다.
회관과 향화정 및 경로당이 마을 가운데에 있어 여름에는 무더위 쉼터로, 겨울철에는 한파 쉼터로 주민들에게는 꼭 필요한 생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경로당 옆에는 샌드위치 패널조 공동 농기계보관창고가 있다.
준향마을에는 마을 입구에 준향감리교회(1980년 설립)가 있고, 마을 뒤쪽에는 호렙산 기도원(1986년 설립)이 있다. 마을 뒤쪽 오른편에 1987년에 건립된 달성서씨 재각인 ‘인위재(仁爲齋)’가 있다.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 정문에서 인위재 방면 약 200m 지점에 1864년에 건립된 밀양박씨 재각인 ‘영모재’가 있다.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Korea Horseman High School)도 준향리에 소재하고 있다. 남원으로 오갈 때마다 학교 목장의 하얀 펜스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은 흔치 않은 광경이다. 볼 때마다 몸도 마음도 평안해진다.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는 국내 유일의 말산업 분야 마이스터고등학교(2014.3.3. 개교)로서 국내외 말산업의 주역을 담당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내 최고의 교육 기반을 갖추고,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교육과정 운영으로 국내 말 산업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전국 말 관련 학교 중 최고의 교육시설(실내마장 2개소, 실외 마장 1개소, 마사 70개, 승용마 43여 두)과 전문능력을 지닌 교수진(말 관련 전문교사 10명, 산업체 우수 강사 3명, 독일 마이스터 교관 1명)을 갖추고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시설 현황은 학교 부지가 51,788㎡, 초지(교내, 교외, 산)가 249,067㎡나 되고, 현재 학생 수는 6학급에 98명이며, 학생들이 전국에서 골고루 입학하고 있다. 교직원 수는 38명이다. 1970.03.20. 운봉읍 동천리에 운봉축산고등학교로 개교하여 2024. 01.04. 52회 졸업생 18명을 포함하여 총 2,43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명문 특수목적고등학교로 성장하였다.
준향리에 1996년에 설립한 ‘향돈촌영농조합법인’과 ‘㈜토담 향돈촌’은 국내 최대·최고의 축산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흑돼지 가공 유통전문회사이다. 식육 포장처리업과 축산가공업의 위생적인 HACCP 시설을 통하여 연간 65 천 두를 가공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향돈촌은 향토기업으로써 지역 양돈농가의 안정적인 소득 창출과 최고의 품질과 안전한 먹거리 ‘지리산 토담흑돈’을 전국 고객에게 공급하고 있다. 또한 지역 일자리 창출에도 큰 몫을 다하고 있다.
2023년 12월 말 현재 이 마을에는 총 66세대에 181명(남자 102명, 여자 79명)이 생활하고 있다. 운봉의 여타마을과 비교하면 큰 규모에 속한다. 현재 달성서씨, 풍산류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성주배씨, 진주소씨, 말양박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 대부분은 밭농사나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특히 원예작물과 축산에 종사하는 농가가 많다. 원예작물 재배 농가 중 방울토마토 농가가 다섯 농가, 사과가 세 농가, 상추, 포도가 각 한농가씩 재배하고 있고, 축산농가도 많은데 한우 농가가 8농가, 대규모 양돈 기업으로 청수농장과 남원농장 두 곳이 현재 운영, 사육 중이다.
준향마을의 지형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를 갖춘 명당이다. 마을 뒤로 병풍 같은 울창한 산이 드리워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준향 천의 물줄기가 가로질러 흐르면서 기름진 옥답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다.
준향마을에는 삼국시대의 준향산성, 이중 순라도, 가마터, 고인돌 등 옛것이 많다. 과거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현대적인 것과 조화롭게 융합하여 특색 있는 마을로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
준향마을의 이야기를 쓰기까지 협조해 주신 소대권 이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남원은 동서로 길게 흐르는 내(川)가 있어 풍요로운 지역이다.
예전에는 농경이 핵심 자원이었지만 지금은 관광이 중심이 되면서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요천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주둔하고 있던 시기에는 농민군의 훈련장 역할을 했다. 요천을 벗어나 운봉 방향으로 가다 보면 닭뫼마을을 지나고 부절리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면 쪽 뜰 유적지 표지석이 보이다.
동학농민혁명 방아치 전투지 류태홍 묘지 안내 표지석에서 운봉 방향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해서 다시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부절리 방향이다.
마을 가까운 쪽에 방아치 전투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길이 좋은 여원치를 선택하지 않고 길이 험한 방아치를 공격 루트로 판단했다.
방아치로 오르는 길은 험한 협곡이라 게릴라 전투의 침투로 역할은 가능했겠지만, 대군을 이끌고 오르는 데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방아치 근처 성에서 지키고 있던 민보군에 패하고 남원성으로 물러나게 된다. 승기를 잡은 민보군은 남원성까지 밀어붙여 동학농민군은 해산되는 결과가 되었다.
옛날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으로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로 이름이 <노루골>이다. 마을 이름은 한문으로 장치(峙)라 부르는데, 행정구역은 장동이다. 순한 동물인 노루의 기질을 닮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온순하고 예의가 밝아 상부상조하는 화평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충무공께서 의금부에 투옥된 후 28일 만인 1597년(정유년) 4월 1일 (음력) 석방된 이순신 장군은 이틀을 한양에 머문 후, 4월 3일 권 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기 위하여 경남 합천으로 향한다.
22일 만에 남원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지금은 폐역이 된 옛 남원역 바로 그 자리인 북문으로 들어섰다. 장군이 이곳을 지나간 후 넉 달도 지나지 않아 남원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후손으로서는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일기에서 고을 앞 15리쯤에서 만났다고 하는 정철은 여수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형제 및 조카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또 장군이 의금부에 투옥된 후에는 구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사거리에서는 ‘용성로’를 만나는데 이 길을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외버스터미널-동림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용성’은 남원의 오래된 역사를 상징하는 옛 이름이다. 동림 사거리에서는 좁고 복잡한 시가지를 피해 남쪽 약 100여m 거리에서 용성로와 나란히 나 있는 ‘요천로’로 길이 이어져 있다.
백의종군로는 요천을 가로지르는 동림교에서 ‘요천숲길’ 을 따라 월락 3거리로 향한다. 월락 3거리에서는 남원경찰서 도통지구대 쪽으로 길을 건너 오른쪽 ‘이백로’로 방향으로튼다. 이백면사무소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백면사무소 앞에서 진행 방향 왼쪽에 있는 ‘과립교’를 건너 이백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농로로 길이 이어지며 목가리 마을회관 앞에 닿는다. 목가리에서 양가 저수지에 이르면 여원재 옛길이 나온다.
양가 저수지에서 약 40분 정도(2km) 진행하면 임진왜란 때에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지나갔다는 내용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 즉 ‘유정과차(劉綎過此)’, ‘유정부과(劉綎復過)’각석(刻石)을 만나고, ‘나주임씨 삼세 충의비’와 ‘여원치 마애불상’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여원치 마애불상’ 이 있는 곳은 고려 말 황산 전투에서 왜구를 토벌한 이성계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애불상을 지나면 백두대간 고개 여원재가 지척이다. 고개를 넘으면 운봉으로 들어서게 되고, 목적지인 운봉초등학교까지는 이제 약 3.5km 남게 된다. 경마축산교 앞 마산교를 지나 사과 과수원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들어 농로를 걷다 보면 서림공원을 만난다. 이제 500m만 진행하면 목적지인 운봉초등학교에 닿는다. 구간 거리 약 17km, 시간은 5시간 정도 소요된다.
▶ 다음호에 계속
☞ 운봉지킴이동회에 대한 문의
010-3131-1088
새마을금고의 기원은 1963년 5월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하둔리, 창녕군 성산면 월곡리, 의령군 의령면 정암리, 의령면 외시리, 남해군 남해면 마산리에서 설립된 다섯 개의 마을금고가 모인 협동조합이다.
이후 1973년 3월 마을금고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82년 ‘새마을금고법’ 제정에 따라 새마을금고연합회를 거쳐 2011년 9월 새마을금고중앙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운봉새마을금고는 1982년 회원 30명, 출자금 13만원으로 설립되어 2024년 6월 말 현재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이 11명 직원이 5명으로 작지만 내실있는 금고가 되었다.
새마을금고 설립시부터 함께했던 류시완 이사장은 42년을 운봉 새마을금고와 함께 한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설립당시 1호 출자자였고 직원으로 시작해 2011년 정년퇴임 후 2012년 이사장으로 취임해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사장직을 퇴임하게 된다.
운봉새마을 금고는 좀도리 정신을 강조한다. 외형과 성과를 키우기 보다는 내실있는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고 류 이사장은 강조했다.
지금은 잊혀진 ‘좀도리’라는 말을 독자들께서는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우리말 큰사전에는 ‘남부지역의 사투리로서 “절미”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좀더 부연 하자면 ‘나는 배고픈 세월을 살지언정 자식 만큼은 배고픈 세상을 살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작은 단지를 부뚜막에 두고 밥지을 때 마다 한 숟가락의 쌀을 덜어 저축하는 행위를 ‘좀도리’라고 한다. 밥짓는 쌀에서 한 숟가락의 쌀을 덜어내면 누군가는 밥을 조금밖에 못먹을 터인데 그러면 누가 밥을 덜 먹었을까? 바보같은 질문이다. 배고픈 세월 물 한바가지로 근검하여 오늘의 풍요를 일궜고 그 밑바탕에는 한 푼 두푼 모은 자산을 잘 관리한 새마을 금고가 있다.
-편집자-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MG MAGAZINE 548호
이달의 칭찬릴레이 주인공은 운봉로타리클럽이다. 운봉로타리클럽은 사회봉사 단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여 무연고 묘 벌초, 장학사업, 취약계층 LED 등 교체 , 현충일 추념식 이후 자장면 봉사활동 등 지역 봉사 활동을 적극 수행하여 왔다.
2024 농촌왕진버스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에 찾아가는 의료서비스 제공
■양방의료지원(남원의료원)
■검안렌즈 돋보기 지원
만 60세이상 주민 및 독거노인등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운봉농협 교육관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농가주부모임에서 자원봉사를 나와 지원해 주었다.
운봉읍사무소 장수사진 지원
운봉읍사무소는 특수 시책으로 2024. 7. 2.(화) 10:00~12:00 운봉바래봉행복센터 2층 강당에서 장수사진 촬영 봉사를 하였다. 운봉읍내 사진관이 없어 장수사진을 마련하지 못한 관내 독거노인 들께 장수사진 촬영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뜻깊은 사업에 화니미용실 원장님의 재능나눔으로 행사가 원활히 진행 되었을 뿐 아니라 고운 사진을 마련해 드릴 수 있었다.
운봉노인회 주차장 개방
조수근 운봉노인회 회장은 노인회관 울타리를 허물고 담장 없는 주차장을 조성 마을주민과 함께 이용하도록 하였다.
운봉로타리클럽은 지난 6월 21일 오헤브데이 호텔에서 3670지구 창립 40주년을 맞아 41대 회장 임원 이사 이취임식을 가졌다.
신임 회장에는 최태윤 씨가 선임 되었다.
○ 2024년 여성농업인 생생카드 발급 안내
발급대상 : 생생카드 1차 신청자
- 추가 신청자의 발급은 추후 별도 안내 예정
- 발 급 처 : 운봉농협
- 신분증, 자부담 2만원 지참하여 방문
카드사용일 : 카드발급일 ~ 2024. 12. 31.
※ 자부담(2만원) 납부 후 카드를 발급하여 사용하며, 기간 내 미사용 시 자동 소멸됨
카드 사용처: 전업종(단 유흥,건강보험적용,사이버거래,
사행성)업종 제외
사용 업종에 한하여 전국에서 사용 가능
○ 2024년 100세 어르신
장수축하물품 지급 신청 안내
신청대상 : 신청일 현재 남원시에 3년이상 계속하여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고 있는 장수 노인(주민등록상 나이가 100세 이상)
신청기간 : 2024. 7월부터
신청방법 : 본인 또는 가족의 위임을 통한 신청
지급물품 : 50만원 상당의 생활필수품
제16회
한국경마축산고 총동문회 정기총회
2024. 06. 15(토)
서림공원에서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 총동문회가 열렸다. 각지에서 모인 동문이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친교를 다지는 자리에 많은 동문이 참여하였다.
운봉소식은 ‘전라북도 마을 공동체 미디어 활성화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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