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0. 17:21ㆍ운봉소식 2024년
취재차 장동마을 가는 길이다. 도로 양쪽으로 벼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고 사과도 붉은색으로 조금씩 물들어 익어가고 있다.
7월, 8월의 역대급 더위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우리에게 풍년의 기쁨을 선사할 준비를 하는 듯하다. 추석 전 햅쌀 판매를 위해 일부는 벼 수확을 마친 논도 있고, 사과도 수확하여 추석 대목을 준비하는 농가들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풍요로운 추석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번 9월호는 장동(獐洞)마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운봉 소재지에서 남원 방면으로 국도 24호선을 따라(황산로) 마산 고개와 연동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여원치 삼거리에 도착한다. 소재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약 3.2km이며, 이곳은 장동마을에 속한 연재 마을(여원치 마을)이다. 여기서 장교마을 방면으로 진행하다 좌측 안쪽으로 약 0.8km를 가다 보면 장동마을에 도착하는데 앞서 언급한 연재 마을과 합하여 장동마을이라고 한다.
옛날에 장동마을은 ‘장치(獐峙)’ 또는 ’노루골(獐洞)‘이라 불렀었다. 장치나 장동 둘 다 앞에 한자는 노루 장(獐)자로 노루와 깊은 연관이 있다. 또 장치는 마을 뒤 이백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기도 하다. ‘신운 성지’ 기록에 의하면 풍수적으로 장동은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했다고 한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노루 장(獐)자를 써서 장동(獐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동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입향조는 신 씨로 알려졌고, 그 뒤로 고 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조금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밀양박씨 제각 가는 길 바로 오른편 논에 예전에 아주 큰 흙 봉분(연동마을 흙 봉분인 독 뫼와 유사 - 2024년 8월호 참조)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동 뫼(똥뫼)’라 불렀다고 한다. 이 모양이 상서롭지 않다고 하여 그대로 보존하여 오다가 경지정리 등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시 발길을 마을 안쪽으로 향하고 마을에 당도하자 넓은 공터에 조그만 동산이 나타났다. 그 동산 아랫부분에 한글로 ‘장동’이라 새기고 한문으로 ‘獐峙’라고 새긴 아담한 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윗부분으로는 수령 약 100년 된 귀목나무 1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숲속에 정자가 세워져 있으니 바로 그 이름 장동정(獐洞亭. 2001.9월 신축) 이다. 신축 당시 장동정 좌측에 장동마을의 유래비를 세워 놓았는데, 내용은 장동마을이 ‘노루가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요, 마을 입구에 있었던 ‘동 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정자 터라고 불렀는데 정자가 세워지기 전에는 운봉 박 씨 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묘지 조성 당시, 마을 뒷고개 너머에 쌍 바위(쥐 모양의 바위 2개) 중 하나를 옮겨 놓았다고 한다. 현재 정자 터에 하나가 그대로 있고, 고개 너머에 본래 그 자리에도 하나가 남아 있다.
마을 대부분에 당산이 소재하고 있는데, 이 마을에도 당산이 있다. 바로 앞 당산과 뒷 당산이 있다. 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고 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앞 당산의 위치는 장동정에서 남쪽으로 낮은 산줄기에 있다. 앞 당산 주변에는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큰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70년대 마을 전기 도입을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대부분 매각하고 지금은 수십 그루만 남아 있다. 뒷 당산의 위치는 마을 뒤쪽 날 등에 있고, 납작한 돌로 석축을 쌓아 만들어져 있다.
장동마을에는 큰 샘과 작은 샘이 있다. 큰 샘은 마을회관을 지나 길 좌측에 있는 직사각형의 마을 공동 샘이다. 지상부에 돌출된 석재는 장대석을 다듬어 우물 정(井)자 형으로 결구하였다. 우물 보존사업으로 강철지붕을 씌우고 샘은 투명 아크릴로 덮어 놓았다.
작은 샘은 정자 터 주변 길 가운데에 있으며 철판으로 덮어 놓아 내부의 확인이 어렵다. 큰 샘과 작은 샘에 관한 위의 내용은 ‘남원의 샘과 우물’ 2015년 남원문화원 발간 책자를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데 취재 결과 최근에 큰 샘은 흙으로 채워지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가운데에 마을회관 겸 경로당이 건립되어 있어 주민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며 휴식하는 공간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밀양박씨 재각인 첨모재(瞻慕齋, 당초 마을 너머에 소재)가 소재하고 있고, 첨모재사적비와 함께 건립되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마을 너머에 김해김씨 제각도 소재하고 있다. 여원치 삼거리에서 남원시 내 방면으로 내려가다 약 150m 지점 오른쪽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주이씨 재각인 감모재(感慕齋)가 소재하고 있다(옛날에 이곳을 ‘중고개’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주이씨 묘지 형태가 스님(중)이 배낭을 메고 있는 모양을 띠고 있어서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한다)
연재 마을로 다시 나오다 보면 포장도로 오른쪽 밭 어귀에 사각으로 담이 쳐진 안쪽으로 쇠문을 열고 들어가자 석각 안에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좌측 비석에는 ‘효자김해김순두행적비’ 라고 새겨져 있고, 우측에는 ‘효열부밀양박씨기적비‘ 라고 새겨 놓았는데, 전자는 효자 김순두 효열비이고 후자는 효자 김순두 모친 효자비로 문중에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장동마을 가는 옛길 왼쪽에도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효열부밀양박씨기적비’라 새겨져 있다. 연재 마을에는 ‘주지사 포교당’이 소재하나 포교당은 비어있는 상태이고 ’주지사’의 위치는 백두대간 길로 올라가다 좌측 이백면 쪽으로 조금 내려가는 곳에 있다. 주지사는 대한불교 선교종이다.
여원치 삼거리에서 남원 시내 방면으로 약 300m 좌측 길 아래에는 ‘여원치 마애불’이 있다. 고려말(고려 우왕 6년 1380년) 부산으로 침투한 왜적이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로 올라오자 고려 장수 이성계가 이를 소탕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남원에서 인월로 가던 중 여원치에서 ’도고(道姑)‘ 라는 노파가 안갯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왜구와 대적하여 승리할 계책 즉, 전투 날짜와 전략 등을 알려주어 황산대첩에서 소년 왜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승리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마애불상은 여원치 정상부 길가의 큰 자연석 면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도고 노파(여인)를 형상화한 불상이라 전해진다. 마애불상 옆 비문이 세워져 있는데 여원치 마애불상 조성에 관해서 1901년(고종 38) 운봉 현감이었던 박귀진(朴貴鎭)이 불상 옆 비문에 기록해 놓았다.
장동마을 여원치(연재)는 예나 지금이나 운봉에서 남원으로, 아니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 여원(女院)이 설치되었던 여원치는 진주, 산청 등 경상도 사람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이곳을 넘나들었고 또 남원시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거쳐 가야만 했다. 지금의 운봉 고물상 앞에는 크고 넓적한 바위가 있어서 쉬는 장소인 원 터(원님이 쉬다가는 자리)가 설치되었는데 경지정리 등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 연재 마을 도로변이나 주지사 가는 소로 옆으로 주막이 형성되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와 파편과 집터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여원치 정상부 백두대간이 지나는 도로변에 돌 벅수(돌장승)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명칭은 ‘운성대장군(雲城大將軍)’이다. 돌 벅수 뒷면에는 운봉의 역사를, 좌측 옆면에는 운봉의 문화유적을 기록하였다. 이 돌 벅수는 남원문화원이 1992년 12월에 세웠는데 이곳 여원치 정상이 남원 평야 부와 산악권익 운봉의 경계이면서 백두대간이 길목으로 경계의 표시와 운봉지역을 수호하는 대장군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고 더불어 문화유적을 알리는 상징물로 세웠다고 한다.
2023년 12월 말 현재 이 마을에는 총 42세대에 66명(남자 35명, 여자 31명)이 생활하고 있다. 연재 마을 6가구와 마을 뒤 봉송황토마을 1가구에 생활하는 주민을 포함한 숫자이다. 운봉의 여타마을과 비교하면 중 규모에 속한다. 현재 밀양박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등 그 외에도 다양한 성씨들이 이 살고 있다. 주민들 대부분은 밭농사나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장동마을의 이야기를 쓰기까지 협조해 주신 이규태 전 이장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어르신을 뵙게 되면 ‘건강하시냐?’ 안부를 묻기 보다는 ‘식사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힘든 일을 할 때도, 밥투정하는 아이에게도, 밥심으로 일하고 밥심으로 공부하며 밥심만이 우리 삶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떼어놓고 생각해 본적이 한순간도 없다. 유구한 역사 속에 한민족을 이끌어 왔던 것도 쌀이었다. 쌀은 경제 단위의 화폐였고 쌀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급속한 경제 성장과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 소비가 증가하였고 웰빙 박사님들이 TV 등 선전매체에 등장해 비만 성인병 등의 위험 요소와 건강한 식단에 의한 다이어트, 건강 채소 과일 등 균형 잡힌 식단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걱정하였다. 서구화된 식습관의 변화, 아침 결식. 먹거리가 다양화되고 풍부해지면서 쌀 소비량은 줄게 되었다. 1993년 1인당 소비량은 110kg이었는데 지난해 56kg으로 줄어들었다. 2024년 8월 19일 자 농민신문에 따르면 소비 부진이 심각한데다, 정부가 추진 중인 쌀 감산 정책도 걸음마 단계이다 보니 매년 공급 과잉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했다. 8월 5일 자 MBC 뉴스에서는 쌀 80kg 전국 평균 가격이 178,476원, 전국 쌀 재고량 40만 톤, 유류대. 비료대, 농자재비, 인건비 등 모든 것들이 상승하여 어려움에 처한 농민을 위해 수급 조절을 통해 쌀값 20만 원을 보장한다던 정부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쌀을 15만 격리대신 5만톤만 격리하겠다고 발표후 재고가 쌓이면서 쌀값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미온적인 정부의 대책으로 수확을 한 달 앞둔 시기에 쌀값 하락의 폭은 더 거칠 것으로 보인다.
운봉지역의 재배면적은 1,170ha, 수확량은 약 10만4백 톤, 지난해 전국 쌀생산면적은 708, 012ha이고 전국 쌀생산량은 370만2천 톤이며 통계청 산지 쌀값 동향자료에 의하면 8월 15일 80kg 한 가마에 177.710원이었다. 운봉지역 고랭지 특성상 쌀값 하락에 대한 정부 대책 발표가 있다 하더라도 추곡수매 전에 수확해야 하므로 대부분 폭락한 시중 시세로 판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2024년 수도작 농가의 수익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2017년 2022년도 50kg 조곡 가격이 4만7천 원대에 거래된 적은 있으나, 쌀은 국민 정서상 농가 소득 안정을 위해 쌀값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쌀은 식량 안보이며, 홍수나. 토양유실, 환경기후 보전적인 측면에서 공익적 기능을 감한 시장 논리에 맡기지 말고 생산 기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마땅하다.
윤석원 중앙대학교 교수에 의하면 (2023년 9월 30일) 정부는 2015년 1월 1일부터 누구든지 관세 513%만 내면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전면 쌀 시장 개방을 선언하고 WTO에 통보했다. 우리나라는 쌀을 포함한 모든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쌀을 개방하지 않은 대가로 의무수입 물량 40만8천 톤 중 30%는 밥쌀용 70%는 기타 가공용으로 수입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쌀가격이 싼 나라에서만 수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국, 태국, 호주 등 쌀을 수출하는 나라별로 설정해 줬다. 나라별 쿼터와 밥 지어 먹는 쌀용 수입을 WTO에 용도 지정을 폐기하는 수정 양허표를 WTO 제출했다고 하나 국내 쌀 실질 가격이 매년 하락하고 있고 생산 기반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나 쌀 농업은 다른 산업에 견주어 보존해야 할 민족적 가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쌀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우리의 주식인 쌀은 농업 경제의 중심이었고 창고에 가득 찬 쌀가마니를 보면 배부르다는 표현으로 곡간에서 인심 난다는 소리를 하곤 하였다. 식습관의 변화와 소비 패턴은 면, 빵, 육류, 커피, 가공식품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쌀 소비량은 줄어들어 농가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쌀 소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소비 촉진책을 찾고 있으나 쉽지 않은 것 같다.
벼 재배면적을 줄이거나, 고품질 쌀을 생산한다거나. 가공용 쌀로 대체한다거나, 천원 밥을 제공한다거나, 여러 가지 방안이 대두되고 있으나 농가의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식량주권을 포기할 수 없는 일, 정부의 적극적 대책을 강력하게 호소하며, 쌀 소비 촉진책으로 “쌀밥 먹고 합시다” 외쳐봄이 어떨까 싶다.
추풍선이란 가을바람의 부채로 가을이 되어 쓸모가 없게 된 부채를 가리킨다. 즉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주어 주인에게 총애받지만, 가을이 되자 쓸모가 없게 되어 한구석 장롱 속에 버려지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유하여 주인에게 총애를 잃고 버림받은 여인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이 고사는 반첩여 ( BC48~2)란 후궁의 원가행(怨歌行)-원망스러워서 부른 노래-라는 시에서 비롯되었는데, 반첩여의 전기는 한서(漢書) 속에 그의 유명한 자상부(自傷賦)와 함께 실려 있으며, 원가행은 문선(文選) 등에도 실려 있다.
먼저 원가행을 살펴보고 거기에 얽힌 사연을 서술할까 한다.
추풍선(秋風扇)
新裂齊紈素
새로이 재단한 제(齊)나라의 흰 비단은
皎潔如霜雪
희고 깨끗하기가 서리와 눈 같네
裁爲合歡扇
마름질하여 합환(合歡)의 부채 만드니
團圓似明月
둥글둥글한 것이 밝은 달 같구나
出入君懷袖
임의 품과 소매를 드나들며
動搖微風發
움직일 때마다 서늘한 바람을 일으킨다
常恐秋節至
문득 두려운 가을이 오면
凉飇奪炎熱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아 가니
棄捐篋筍中
가을 부채는 장롱 깊이 버려져
恩情中道絶
님의 은정이 중도에 끊기는구나.
앞에서 살펴본 원가행에서 ‘가을 부채’ 즉 추선(秋扇)이 장롱 깊이 버려져…. 에서 앞에서 말한 추선(秋扇)이 바로 추풍선(秋風扇) 이라고도 하고 추풍지선(秋風之扇)이라고도 하게 된 것으로 반첩여가 자신의 처지가 바로 추풍선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반첩여의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면 반첩여는 한무제(漢武帝) 때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반황(班況)의 딸로 이름은 염(恬)인데 한성제(漢成帝)의 후궁이 되어 총애받으면서 일약 상경에 해당하는 ‘첩여’라는 품계를 받았다.
‘첩여’라는 품계는 궁중 여성으로서는 최고위 품계다. 그러나 궁중이란 음모와 계략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후궁으로 들어와 총애를 받고 있는 조비연(趙飛燕)과 그의 여동생이 허황후(許皇后)를 제거하기 위해 일을 꾸며 반첩여가 허황후와 짜고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는 후궁들을 저주하고 또 황제에 대한 욕을 했다는 것으로 무고하게 옭아 넣었다. 이로 인해 반첩여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결백을 주장하여결국은 혐의가 풀리고 금(金)까지 하사받았다.
이후에 반첩여는 자신의 신세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런 일이 또 없으라는 법이 없기에 후궁살이를 떠날 것을 결심하고 장신궁(長信宮)으로 들어가 황태후를 모시며 지내겠다고 원하여 성제(成帝)의 허락을 받았다. 성제(成帝)의 모후(母后)인 황태후는 반첩여가 후궁으로 들자 그를 귀여워해 주었었다.
장신궁으로 들어가 황태후의 말 상대로 호젓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제가 죽은 후 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를 추억하는 것으로 40여 년의 생을 마쳤다 한다.
장신궁에 있으면서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搗素賦), 원가행(怨歌行) 세수의 시를 지었는데 앞에서 본 원가행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황제의 사랑은 오래 받진 못했으나 궁중 질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슬기롭게 살아남아 후대의 문인과 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추풍선’처럼 시절 지나 버려진 물건 이거나 버린 받은 불쌍한 여인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 또한 중요하다. 인생사가 새옹지마(塞翁之馬) 같기에 예전에 소중했던 것이 지금은 필요 없게 되었다 치더라도 무조건 버리지 말고 혹 다음에 쓰일 것을 생각해 잘 보관해 두든지, 아니면 그것이 새로이 쓰일 것을 예측하고 그 방향으로 놓아 보내든지 하는 지혜를 추풍선 즉 가을을 맞이한 부채에서 얻어 본다.
본지가 독자분들 덕에 도착할 때면 벌써 추석 명절 연휴가 끝나가겠지만 올 추석도 풍년 속에 조상님들께 감사하여 성묘하고 고향 친지분들과 죽마고우분들을 만나 보고 일 년의 힘듦을 며칠의 즐거움으로 녹여 버리는 추풍을 일으키는 부채로 거듭나길 바란다.
참여교회
권포교회, 넘치는교회, 드림교회, 산내교회, 성령충만한교회, 소망교회, 신기교회
장교교회, 준향교회, 호렙산기도원, 황산교회, 힐링교회
우리나라의 가을 명절을 추석, 혹은 ‘한가위’라고한다.
추석에는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가족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곤한다.
꿀이나 깨 등을 넣어 만든 송편은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지면 토한국, 과일, 햇쌀밥 등 지방마다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추석과 같은 명절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풍습은 달라도 세계 각국에도 추석과 같은 명절이 있다.
○ 미국의 추수감사절
11월 네 번째 목요일이며 우리의 추석과 같이 큰 명절이다. 휴무일도 길며 대표적 음식은 칠면조 구이다.
○ 중국의 중추절
음력 8월15일이다. 우리가 송편을 먹듯이 가족들이 월병을 함께 먹는 풍습이 있다.
○ 일본의 오본(お盆)
본래는 음력 7월 15일에 치르는 명절이었으나 양력을 받아 들이면서 8월 15일에 치르게 되었고 화과자나 ‘당고’라는 떡을 먹는다.
○ 독일의 에은테단크페스트(Erntedankfest)
10월 첫주말에 치른다. 1910년 바이에른 왕국의 황태자가 자신의 결혼을 기념하여 무료로 맥주를 나눠준 것에서 기원하였으며 사람들은 각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나와 나누며 축제를 즐긴다.
○ 프랑스의 투생
11월의 첫날을 기념하여 치른다. 미국의 할로윈데이의 기원이기도한 투생에 먹는 특별한 음식은 없다. 다만 제철과일인 사과와 배를 갈아 만든 타르트를 먹는다.
소석마을 작은 음악회 개최(8/16)
운봉 소석마을 주민들이 서림숙에서 소석 난타팀과 운봉농악단 경찰 락벤드 드림팀이 함께 하여 마을 주민과 지역민이 함께 어우려진 자리를 마련하였다.
귀촌 아재들의 비닐하우스 만들기다.
운봉에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은 몇몇 가족들이 자주 모여 동아리 활동도 하고 밥도 먹고 숲을 걷기도 하고 외지 나들이도 함께 하면서 형제들보다 더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다.
‘운봉읍 귀농 귀촌 협의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분봉 지킴이’ 동아리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이번에 Self-Help(자조) 라는 주제로 각자의 집에 필요한 크기의 비닐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회장인 강형구 회장의 도움으로 힘을 모아 시공을 시작했다.
4월 29일 협의를 하고 바로 다음 토요일 아침에 모여서 작은 하우스 샘플 구조를 만들면서 전동드라이버 사용 방법부터 하우스 부품들을 익히고 자신의 집에 만들 하우스 크기와 구조를 설계했다.
최저의 비용으로 짓기 위해 서로 시간을 할애하고 밴딩 파이프도 사용하던 것을 운반하고 작은 것들은 직접 주문하여서 트럭이 있는 회원이 운반하였다.
5월 6월 두 달 동안 자기 일을 하다가 짬을 내어 조금씩 이어가고 7월이 오기 전에 3동의 비닐하우스를 완성하고 7월 7일에는 함께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자축 파티를 하였다.
이 여섯 가족은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함께 힘을 모으기로 하고 두 번째 프로젝트를 생각하기로 하였다.
2024년 8월 30일 기준 운봉인구
인구수 : 3,591명(남 1,743 / 여 1,848)세대수 : 2,038세대
제22회 운봉읍민의 장 수상자 선발 요강
- 운봉읍 출신자 및 거주자 중 다음 각호에 해당한 자 -
① 공 익 장 : 공공사업, 사회사업, 기타 봉사활동을 통하여 읍민의 복지 향상에 기여한 자
② 산업근로장 : 새로운 기술보급과 생산성을 높이는 등 읍민 소득증대와 산업보호 육성, 발전에 기여하였거나
맡은바 자기 직무에 창의력을 발휘하여 근로 향상 및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자
③ 애 향 장 : 운봉읍 출신으로서 우리고장 발전과 화합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자
④ 효 열 장 :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미풍양 속의 귀감을 실천함으로써 널리 주민의 칭송을 받는 효자, 효녀, 효부, 열녀
⑤ 행정공로장 : 공직자(현직, 전직)로서 운봉읍 발전에 헌신적으로 공헌한 자
⑥ 모범노인장 : 65세 이상 주민으로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사회와 이웃에 헌신하여 타의 귀감이 되는 자
9월 추천도서
할머니의 용궁여행
저자 : 대니얼 J. 레비틴
출판사 : 와이즈베리
출판년도 : 2022
소장자료실 :
종합자료실
청구기호 :
671.18-레49음
음악일류
저자 : 권민조
출판사 : 천개의바람
출판년도 : 2021
소장자료실 :
아동자료실
청구기호 :
J 813.8-권39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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