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2. 15:32ㆍ운봉소식 2024년
운봉소식 3월호
의병 활동
[구한말 의병]이라는 책에 따르면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한 면암 최익현이 정읍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평지인 데다 변변한 성 하나 없는 태인에서 의병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동학란 때 민보군을 결성하여 운봉을 사수하여 낸 박봉양과 접촉하였다. 운봉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박봉양이라는 인물의 군 지휘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최익현의 제안에 박봉양 쪽에서 긍정적 반응을 보여왔고 최익현은 직접 편지를 써 진안 사람 이병하와 조카 최은상을 시켜 운봉 사람 박봉양에게 전하여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이 남원으로 내려가고 남원에서는 박봉양이 일으킨 의병이 호응하기로 하였다.
운봉사람 박봉양은 남원사람 양한규(박봉양의 처남)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고 태인 의병과 남원에서 연합하여 운봉에다 거점을 마련하기로 계획 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이 순창까지 밀고 내려왔고 남원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순창으로 밀고 가다가 교전 중 양한규는 사망하고 박봉양은 지리산으로 숨었다.
최익현의 의병 또한 고종의 설득과 토벌군이 관군으로만 구성 되었다는 것(동족과 싸울수 없다는 압박)에 무너져 패퇴하고 최익현은 잡혀 대마도로 끌려갔다.[『전북의 병사』 하, 615쪽] 박봉양은 그 후 무력으로는 일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 후학 양성에 매진 1907년 8월 23일 운봉만성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가 오늘날의 운봉초등학교가 되었다.
[출처] 인적 교류를 통해 본 전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사회관계망 구성
운봉 다케이시 수비대 습격사건
박동의 의병 80여명은 1908년 6월 11일 전라북도 운봉군(雲峰郡-현 운봉읍)에서 다테이시(立石)수비대를 습격하였으나 어떤 전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후 다케이시 수비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해 9월경 박동의 의병이 함양군 마천면 일대에 격문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 9월 13일 방장봉(方丈峯) 부근에서 박동의 의병과 일본군이 교전하였다 하고 김순오가 붙잡혀 사망 , 1908년 10월 박동의 의병장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압송되던 중 사망하였다 했다. 순서로 볼 때 김순오가 다케이시 수비대 습격 때 붙잡히고 박동의 의병장은 방장산 전투 때 붙잡힌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출처]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만세운동]
운봉에서의 만세운동은 남원지역 만세 운동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운봉사람들이 크게 호응하여 남원에서 처럼 만세 운동이 일어 일어났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만세운동 주도세력인 천도교(동학의 후신)와 기독교의 교세가 운봉땅에서 미약한 탓이 아니였을까 생각 된다. 잠시 남원에서의 만세운동을 살펴보면 남원군 둔남면(屯南面 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獒樹里)의 천도교 전도사 이기송이 1919년 3월 2일 덕과면 사율리 천도교인 이기원·황석현·황동주 등에게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기원은 이기송으로부터 전달받은 약 4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아침 금동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로 가져갔고, 거기서 유태홍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유태홍은 3.1운동에 대한 당위성을 교인 유석을 포함한 8명에게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군내 각지에 배포하도록 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남원 읍내와 운봉 4개면에도 배포하였다.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다음날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는 덕과면의 만세 시위에 자극받은 유지와 군민이 만세 운동을 하였다. 이날 만세 운동에 운봉읍민 역시 상당수 참여 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이날 남원의 만세 시위를 선두에서 주도했던 청년 방극용(房極鏞)이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순절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가 일본군에게 거세게 항의하다가 살해되었다. 4월 4일 밤에는 남원 서쪽 교룡산(蛟龍山)에서 봉화를 올린 것을 신호로 봉화 시위를 하였다.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방을 준비했던 운봉의 지식인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운봉의 젊은 지식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였다.
이십대 전후의 청년들이 노상인의 집에서 만나 다음과 같이 결의 하였다.
첫째,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 책을 서로 교환하여 읽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둘째, 일본의 민족 차별 대우 탄압정책 및 기타의 만행등을 우리 민족에게 고발, 항일의식을 높이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한다.
셋째, 징병을 절대로 기피하고 지리산에 은신했다가 미군이 상륙하면 바로 동참할 준비를 할 것.
1945년 5월 초 운봉금융조합(현 운봉농협)에 근무하던 박주영이 남원 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의하여 체포 구금 됨으로서 5.13투옥 사건이 표면에 드러났다. 이에 남은 친구들은 서로 연락을 하여 관련 서적, 일기장, 편지 등을 소각하거나 은닉 하였다. 그러나 장홍식, 노상인(당시 남원군청 내무과 근무), 정영필(보절 국교 교사), 정인호(순천 조흥은행원) 등이 구속되고 며칠 뒤에 서태규 이정옥 노형봉 이현필, 노종선 등이 연행 구금되었다. 이것이 5.13 투옥사건이다.
[출처] 남원의 시대별 역사 스토리
박정석, 박기영 판결문
[재판기록으로 본 운봉의 독립운동가들
박순영(朴舜永): 22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04월 19일 징역 1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504 번지
최성환(崔星煥) 20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0년05월 29일 징역 4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산덕리 90번지
최육득(崔六得) 26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4년03월 31일 징역 10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산덕리 90번지
임철호(林喆鎬) 22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04월 19일 징역 1년 6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503번지
조석우(趙錫祐) 46세 내란
1909년 11월 15일 징역 종신
전라북도 운봉군 군동면 청학동
박이열(朴利烈) 49세 폭동
1910년06월 29일 징역 1년
경상남도 고성군 원산면 노대도
박준상(朴準祥) 20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04월 19일 징역 1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444번지
박종협(朴宗夾) 22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 10월 04일 징역 1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북천리 165번지
박종암(朴鍾岩) 25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04월 19일 징역 1년 6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서천리 114번지
이근호(宮本根鎬) 29세 불경죄
1941년 12월 22일 징역 6개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매요리 385번지
안희탁(安禧鐸) 22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04월 19일 징역 1년 6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정운종(鄭雲宗) 25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 10월 06일 징역 1년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권포리 683번지
정운태(鄭云台) 25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 10월 06일 1년 6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권포리 606번지
정현수(鄭鉉壽) 25세 치안유지법 위반
1933년 10월 06일 징역 1년 6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권포리 663번지
[출처]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독립운동관련판결문
독립운동가 수형인 명부
독립자금 모금
박정석, 박기영은 대한국민회 전주지부를 부활시켜 비밀리에 지주들을 상대로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전경도에게 전달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그들은 모금 대상 지주들에게 모금의 취지를 안내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먼저 친일 행동의 부당성을 거론하고, 이후로는 친일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설파하고 다음은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을 위한 독립자금을 내놓을는 것, 불시에 찾아갈 터이니 미리 준비해 놓으라는 내용이다. 이들은 편지를 여러통 작성하여, 남원 일대와 운봉일대 그리고 그 인접 지역 지주들에게 보내었다. 독립자금을 내 놓으라는 편지를 받은 남원과 운봉의 지주들은 자의든 타의든 상당량의 독립자금을 내 놓았고 이렇게 모인 독립자금은 1,020원이었으며 이때 백미 한 가마니가 1원 50전 정도였다 하니 오늘날의 쌀 시세로 환산하면 육억여원에 이르는 큰 금액이다.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박권영은 5년형, 박정석은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운봉, 격동의 근현대사
운봉에서 의병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운봉사람들이 남원 의병에 참여하고 운봉에서는 이렇다 할 교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운봉에서 독립운동과 해방된 조국을 맞으려는 젊은 지식인들의 자세는 경이롭고 놀라우며 운봉의 후손으로서 자긍심이 차오를 만하다.
단결권·파업권 확립, 소작료 최고 4할 결정, 소작인의 노예적 사용 금지, 여자 인신매매(위안부) 금지, 사원급 노복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 문맹 타파 운동 은 사회운동이고 독립운동이고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이었다. 또 어떤 이는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대동아 전쟁에 참전하여 일본 본토가 공습받고 있어 곧 망할 것이라는 소식을 운봉 인민에게 전하여 일본이 망할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하였 일본이 망하고 우리가 독립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토의하고 연구하였으며 실지로 이러한 혐으로 붙잡혀 옥살이를 한 운봉사람들도 있었다.
이 땅에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들이 있었다. 그러나 남원의 독립운동사를 반추해 볼 때 좌우 갈등은 커녕 오히려 조국의 독립이 먼저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남원청년동맹·신간회(新幹會)·형평사(衡平社)·대동단 등 여타의 독립단체가 남원지역 청년회로 결속되어 활동하였다. 그것이 바로 남원의 힘이고 정신이었다.
남원청년동맹은 창립 이후 8월 26일 남원예배당(현 남원제일교회)에서 사상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29년 3월 12일에는 운봉지역연맹 정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남원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16일에는 건국 청년치안대가 조직되었으며 운봉역시 예하 조직으로 건국 치안청년대가 결성되었다.
-편집자-
▶다음 회차에 계속
고복격양은 ‘배를 두드리고 흙덩이를 치며 즐겨워 한다.’는 뜻으로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는 삼황오제로 총칭되는 뛰어난 제왕들이 있었는데 그중 오제(五帝)에 제요(帝堯), 제순(帝舜)이 포함되어 있는데 제요, 제순은 유교에서 이상 세계의 군주로서 칭송 받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며 쓰고 있는 ‘요순시대’니 ‘요순시절’이라는 말로서 표현되고 있는 태평성대의 이상 정치가 바로 이 임금들이 다스렸던 시대를 말한다.
악부시집
고복격양의 유래는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임금의 치세(治世)를 노래한 격양가(擊壤歌)에서 나온 것으로 출처는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요(帝堯) 편, 악부시집(樂府詩集) 격양가 등에서 나온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 인자함이 하늘과 같고, 아는 바가 산과 같다’는 칭송을 듣는 요임금이 선정을 베풀어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난 어느날 자기를 천자로 받들기를 원하는지, 또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미복(微服) 차림으로 대궐 밖으로 암행을 나갔다. 어느 길목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라네, 함부로 아는 척도 않고 오로지 상제의 법도를 따르셨다네.”라고 하자 마음이 흐뭇해진 요임금은 계속해서 발길을 옮겨 어느 마을 끝에 이르자 한 노인네가 배불리 먹고는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지팡이로 흙덩이를 치면서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네, 밭을 갈아 내가 먹고, 우물 파서 내가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란 게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이 화를 내기는커녕 흐뭇해하며 ’그렇지! 좋은 정치란 아무런 간섭 받지 않고 그저 편안히 제 할 일 하고 넉넉히 먹으며 쉴 때 쉴 수 있는 백성들이 그런 것이지’ 이것이 바로 요임금이 구현하려는 태평성대 무위(無爲-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순리대로 하는 것)의 정치인 것이다. 백성들에게 선정의 혜택을 주어도 백성들이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치 말이다. 이로부터 ‘고복격양’은 태평성대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또 격양가를 부른다고 하면 역시 태평성대를 구가 한다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예전에 비하면 비교적 고복격양의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의료복지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돈 한푼 없어 병원 한번 못 가고 약 한번 쓰지 못했던 우리네 이웃 이야기를 흔히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 않은가. 현재의 좋은 점은 계승 발전시키고 부족한 점은 노력 보완하며 잘못된 것은 개선 하다 보면 그중에 태평성대가 절로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고복격양의 시대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길이라 생각된다.
이학규 공안서당 훈장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공부는 못해도 기억력은 좋았다. 그래서 한번 본 것은 기억 속에 사진으로 자리하곤 했다. 때문에 몇 번 가본 고모네 집에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부산에 가자고 했다. 운봉에서 부산은 지금도 자동차로 서너 시간 걸리는데 참 겁도 없었다. 겁이 뭔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가게와 이발소 그리고 농사를 겸하셨다. 그래서 집에는 물건을 나르는 짐바리(짐 나르는 자전거)가 있어서 4학년 때라 생각되는 그 어린시기에 짐바리 자전거를 배워 타게되었다.
그 후 내 무릎은 상처 딱지를 붙이고 살았다. 비포장도로라 넘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5학년이 되어 안장에 앉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자전거 페달을 굴리려면 몸을 한쪽으로 내려앉다 시피해야 페달을 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뒤에서 보면 자전거는 반드시 가는데 사람 몸은 이쪽저쪽 왔다같다 비틀 비틀 거렸다.
어느 정도 자전거 타는게 익숙해지자, 용기가 뿡뿡 일어나 자전거로 부산 고모네 집에 가보고 싶다고 무모한생각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동네친구들에게 “우리 자전거 타고 부산에 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시큰둥 했다. 하긴 초등학교 5학년이 자전거 트래킹을 그것도 신작로 길로 부산까지….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은 나보다 현명했었던것 같다. 아무도 나를 따라 나서지않았으니 말이다
짐바리 자전거
물도 수건도 없이 나섰다.
당시 화장실은 골프식이고 물은 샘에서 길어 먹던 시절이라 수건도 물병도 귀했지만 미처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다. 비전마을을 지나 피바위쯤 왔을 때 신작로는 자갈길로 바뀌어 자전거가 스카이 콩콩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얼마 못 가 자전거는 넘어졌다.
운봉을 출발 한 후 첫 사고다. 무릎과 엉덩이를 손으로 탈탈 털고 일어나 자전거를 세웠다. 뒈지게 무거운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 것은 무리인거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외가 댁으로 가기로 했다. 외가댁은 산내(살래) 장항리(노루목)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하고 같이 가곤 했던 곳이다. 인월에서 산내는 산을 끼고 냇가(람천)를 따라가는 길이라 신작로가 더 험했다.
쉬지않고 신작로를 달린 덕에 마침내 버들(버스 정류장을 겸한 가게)에 도착했다. 부모님이랑 외가댁에 가려면 버스에서 내리던 곳이다. 난 ‘버들’ 집 아주머니에게 자전거를 맡기고 장항리(노루목)로 가기 위해서는 냇가로 내려가야 했다. 냇가 징검다리는 냇물이 불어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아 아무도 건너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 냇가는 폭이 50m 정도 되어 물이 많고 물살이 쎄 건넌다는 것은 죽음을 담보로 도전해야 한다. 어린 나는 언덕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징검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전화라도 하는데, 그때는 공공기관 외에는 유선 전화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이 인편에 의해서 전달되던 시절이다.
한 두 시간 냇가에 앉아 넋 놓고 물 구경을 하고 있는데 부모님이 자전거를 타고 찾아오셨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인데 집에서는 자식이 사라졌으니 난리가 났던 것이다. 부모님은 동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자전거로 부산에 간다고 했단다. 마른하늘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부모님은 동내에서 자전거를 빌려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부모님 편에서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고, 가슴이 미어터지는 일이다. 부모님은 하던 일을 미루고 아들을 찾아 무작정 나서셨단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외가댁으로 나를 찾아 오신 것이다.
하여튼 어머니는 우시면서 나를 대하시고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다치지는 않았는지….
아버지는 빌려온 자전거에 내가 타고 온 자전거를 싣고, 집이 있는 운봉으로 걸어오면서 과거의 추억 속에 기억을 들려주셨다. 여기는(백장암 근처일 것 같다) 산내(장항리)에 가서 배추를 손수레에 싣고 오시다가 도로에서 미끄러져 냇가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끌어 올렸다. 아버지는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을 가셨다.
하루는 가족이 함께 밭에서 일을 했는데 달이떳고 성산(잿매산)에서는 동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집에 오니 저녁 10시였다, 하루의 계획을 아침 4시에 세우고 4시 30분이면 집을 나가서 계획했던 일을 마쳐야 일과가 끝나는 분이었다. 신작로를 부모님과 함께 오면서 가족이란 무엇인지 생각은 못 했지만, 오감으로 느끼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북천마을 김정길
농가 주부 모임은 운봉농협의 자조 조직이다.
‘농업에 기반을 둔 운봉의 여성회원들이 모여 봉사와 친목을 다진다는 취지의 모임’이라 하여 올해는 나도 신입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신입회원으로 첫 봉사는 운봉장날 따뜻한 차 봉사를 하고 다음달에는 반찬 봉사를 하기 위해 읍사무소에 나가 각자 맡은 일을 하며 잠시 옛 생각이 났다.
결혼하고 시어른께 인사드리기 위해 처음으로 운봉땅을 밟던 일이 생각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낭떠러지로 처박을 것만 같은 고갯길, 봄인데도 살을 에는 추위, 가을인데도 금방 저 버리는 해 뭣하나 적응되지 않는 기후와 생활풍습….저녁을 먹는데 “정지 가서 지 좀 가져와라.”는 어머니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몰라 멀뚱멀뚱 신랑만 쳐다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버렸고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것이 아닌 우리 이웃을 챙기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며칠 전에는 물품 나눔 행사를 하였다.
집안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녀석들 중에서 그래도 이웃과 나눌만한 물건을 챙겨 농협 2층으로 갔다. 벌써 많은 회원이 각자의 물건을 꺼내 놓고 물건의 가치를 정하고 그것을 상품으로 팔았다. 회원들이 물건을 내놓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그 수입금은 농가 주부 회원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라고 한다.
-농가주부모임 신입회원-
운봉읍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를 가졌다. 사진은 매요 권포 서남 마을 순이다..
운봉농악단은 보름을 맞아 농악놀이를 하였다.
농악단이 보름에 농악놀이를 하는 전통문화의 하나이다.예로부터 마을에서 정월 초에서 보름 사이에 꽹과리ㆍ징ㆍ북ㆍ장구ㆍ태평소 등으로 구성된 풍물패(농악단)가 마을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동우물과 서낭당, 일반 가정집에서는 대문, 부엌, 마굿간, 장독대 등을 돌며 복을 빌어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풍습이 오늘에 이르러서 전통 놀이가 되었으며 운봉애서는 상가 혹은 관공서를 돌며 농악놀이를 하여주고 있다. 운봉농악단은 단장 문광호 씨와 20여 명의 단원이 운봉읍사무소(사진 참조) 관공서 지역 내 상가 등을 돌며 농악놀이를 하였으며 매요마을에서는 달집태우기 행사에도 참여하여 그 흥을 돋우었다.
이은주 읍장은 지난 4일 운봉초등학교에서 19명의 입학생에게 5만 원 상당의 학용품을 전달하였다.
운봉향교는 고유제를 지냈다. 고유제란 나라에 혹은 지역사회에 고 할만한 일이 있을 때 치러지는 제례의 일종으로 이번 고유제는 이은주 읍장의 부임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운봉향교 일요학교에서는 지난 2월 18일에 서예전을 했다. 이번 서예 전시전은 일요학교에서 공부하는 회원들이 지난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서예 실력을 진한 묵향에 담아 전하였다.
국도 24번 길 운봉읍에서 인월방면으로 가다 사치길로 접어들어 가다 보면 매요 마을에는 옛 운성국민학교가 있고 그 자리에 서각 공방이 있다..
15년 전 폐교된 운성국민학교룰 교육청으로부터 구입하여 조금씩 꾸며 온 것이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는 박종미 여사와 어머님이 이주하여 매요마을 주민으로 살고 계신다.
오 작가의 작품세계는 전통 서각을 기반으로 현대적 감각을 살린 현대 서각을 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규석 작가는 29회 전북 서예대전 입선, 23회 전통공예 대전 입선, 3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54회 인천 미술대전 특선, 15회 죽농 서화대전 특선을 하는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는 실력 있는 작가이다.
옛 운성국민학교 교실 한켠에 전시관을 마련한 오 작가는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전시관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예약하시면 가능하다.
운봉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 사는 정이 좋아 귀촌을 결심했다는 오 작가는 끊임없는 작품세계를 탐구하는 한편 직접 농사짓고 그것으로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핸드메이드 팜스테이 농장을 꾸리고 있다.
또, 백두대간과 지리산 둘레길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옛 관사를 개조해 만든 민박집도 운영하고 있으니, 지역민이나 외지에서 운봉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이곳을 찾아 예술작품도 구경하고 운봉의 경치도 즐겨보는 것이 좋을듯싶다.
오규석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람하고 싶은 독자들께서는 아래의 전화로 예약하고 방문해 주시길 추천한다.
관람 문의 010-8020-8272
작가 오규석
2024년 2월 28일 기준 운봉인구
인구수: 3,636명 (남 1,768 여 1,868) 세대수: 2,043
제 94회 춘향제
○ 한복 기부 캠페인 기간 : 2024. 1 ~ 4월
- 대상품목 : 세탁된 깨끗한 한복(성인, 아동, 전통, 특수복)
- 기부방법
*운봉읍사무소 방문 제출
*택배 제출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어현동 37-69(춘향제전위)
○ 소원등 사전 신청
- 신청기간 : ~ 2024. 4. 5.까지
- 금 액 : 소원등 1개당 9천원(신청자 부담)
- 신청방법 : 운봉읍사무소 방문 접수
○ 대동길놀이
- 행사일시 : 2024. 5. 15. 14:00
- 참석대상 : 읍민 100여 명
- 주 제 : 황산대첩 재현
2024 어르신 교통카드 발급
○ 신청 기간 : 2023. 12. 1.(금) ~ 상시 발급
○ 신청 대상 : 2024년도 기준 만 70세 이상 되는 남원시민
(1954년생부터)
○ 신청 방법 : 읍사무소 방문 신청 (신청서 및 위임장 작성) ※ 202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만 70세가 되면 신청 가능
분실 시 재발급 수수료 5,500원
2024 출산여성 농가도우미 지원사업
○ 신청 기한 : 출산 전 30일부터 출산 후 150일까지 180일 기간 중 90일
○ 지원 대상 : 출산 또는 출산 예정 농촌 거주 여성농어업인
○ 지원단가 : 90,000원* 최대 90일 (보조 729만원, 자담 81만 원)
○ 농작업 도우미 : 신청대상자의 배우자, 직계 존·비속, 직계 존·비속의 배우자, 본인이나 배우자의 형제·자매는 농가 도우미로 지정·이용할 수 없음
○ 제출 서류 : 농가 도우미 신청서, 농가 도우미 근로계약서
부정기 후원
오규석
정기후원
배분남, 홍봉록, 오용담, 정원재, 이은숙, 조미현 운봉읍발전협의회, 양재우
본 후원금은 매월 5일까지 내용까지 산출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김복기의 모친 조봉선 여사 별세
아들 : 김복기, 운기, 상기
며느리 : 김민자, 박지숙, 이영애
딸 : 김숙자,양자,덕선,선숙,성례
사위 : 채병건,김종옥,박희상,이선팔
장지 : 운봉 산덕 선영
김성길의 모친 김예분 여사 별세
아들 : 김성길, 성만
며느리 : 손공남,임미경,유미경
딸 : 김성선
사위 : 김연응
장지 : 승화원
운봉소식 3월호 전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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